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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청년이라는 단어가 불편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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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홍상지 기자 중앙일보 기자

홍상지
사회2부 기자

천성이 게으른지라 쉬는 날에는 누워 있는 걸 좋아한다. 배고파지면 밥을 먹고, 졸리면 다시 자는 그런 하루. 딱히 무언가 새로 찾아서 하고 싶진 않다. 그럼에도 난 휴일마다 부지런히 무언가를 하려 한다. 책을 한 권 읽든, 운동을 하든, 영화 감상을 하든 뭐라도 ‘생산적인 일’ 말이다. 왠지 가만히 누워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한 장면은 있다. 1년 전쯤 “휴일엔 뭐하니?”라고 묻는 선배에게 “집에 누워 있어요. 그게 편해요”라고 했을 때 상냥한 선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되물었다. “뭘 하고 싶은 의욕이 없는 거야? 젊은 애가 벌써부터 왜 그래….” 휴일에도 묘한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을까. 애석하게도 내 나이는 ‘젊은 애’, 즉 ‘청년’에 속했다. 고로 하나라도 더 도전하고 움직여야 하는 게 사회가 바라는 내 덕목이었다.

문제는 그런 압박감에 너무 익숙해진 나 자신이었다. 청년이라면 좀 더 알차게, 활기차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난 쉽게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삶에서 가끔 ‘멈춤’ 버튼을 누르는 게 망설여졌다. ‘청년’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버려두고 싶은 짐짝 같았다. 나만 그런 건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다. 지난해 12월 마지막으로 열린 중앙일보 신문콘서트에서 한 관객은 말했다. “주위 친구들이 차별점을 갖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을 보면 청년이라는 단어가 20~30대를 너무 미화하는 단어처럼 느껴져요.” 백번 공감했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들려오는 ‘청년이 미래다’ 식의 구호도 이제 식상할 지경이다. 지난 18일 조선대에서 강연을 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학생들에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정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라도 했으면 한다”고 조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왜 미래는 청년이 다 짊어져야 하는지, 여기서 뭘 또 더 고생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가 2006년 발표한 『문학비평용어사전』에 따르면 ‘청년’이라는 용어는 ‘전통 사회의 안정성이 흔들리고 민족·국가라는 거대 지평이 사라졌던 1910년대 한국 사회에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경술국치 때나 지금이나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청년에게는 늘 구국의 의무가 더 강하게 주어지나 보다.

한국 사회가 청년이라 부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굳이 누군가 격려하고, 조언하지 않아도 이미 사회가 씌운 ‘청년’이라는 굴레에서 충분히 발버둥치고 있다. 맘 편히 쉬는 법도 잊을 만큼. 그러니 이제 청년을 좀 내버려 두시라. 화살은 청년이 아닌, 청년에게 모든 희망이 몰린 사회를 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청년이라는 말이 보다 더 옅어진 사회를 지지한다. 내지는 모든 사람이 청년이 된 사회를.

홍상지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