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보수의 반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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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31면

1870년 1월 19일 미국의 시사 주간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당나귀가 그려진 한 컷짜리 만화가 등장했다. 당나귀는 죽어 쓰러진 사자를 뒷발로 걷어차고 있었다. 사자는 사망한 지 얼마 안된 링컨 내각의 전쟁부 장관이었고, 당나귀는 민주당 내 남북전쟁 반대 세력을 의미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 민주당을 상징하는 동물인 당나귀는 토마스 내스트라는 만화가에 의해 이렇게 처음으로 시각화되었다.


왜 하필 당나귀였을까? 당나귀의 일반적 이미지는 멍청하고 고집스럽다는 것이다.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다. 사실 당나귀는 미국 최초의 민주당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의 후보 시절 정적들이 그를 조롱하려고 붙인 별명이었다. 잭슨(Jackson)이 수탕나귀를 뜻하는 ‘jackass’와 발음이 비슷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잭슨과 그 지지자들은 당나귀의 서민적인 이미지를 반겨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 이용했다. 이렇게 시작된 당나귀와 민주당의 인연은 내스트의 만화로 굳어지게 되었다. 내스트는 미국 시사 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로 20년 이상 하퍼스 위클리에 만화를 그리면서 민주당의 상징으로 당나귀를 사용했다.


내스트는 평생 공화당 지지자였다. 그래서인지 내스트가 그린 당나귀는 저돌적이고 교활하기까지 하다. 민주당의 당나귀에 대별해서 내스트가 만들어낸 공화당의 상징은 코끼리였다. 그러나 내스트가 공화당 지지자라고 해서 코끼리를 긍정적으로 그려낸 것은 아니었다. 내스트 그림 속 코끼리는 덩치는 크지만 활기가 떨어지고 겁많은, 그래서 당나귀에게조차 당하기도 하는 존재였다. 코끼리가 처음 등장하는 만화에는 민주당 지지 언론을 상징하는 당나귀가 사자 가죽을 덮어 쓰고 여러 동물들을 겁주어 쫓아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그 중에 ‘공화당 투표자’라고 몸통에 표시된 코끼리가 당나귀를 피해 달아나면서 미처 앞에 있는 큰 구덩이를 보지 못하고 곧 빠질 것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내스트는 공화당의 상징으로 왜 코끼리를 골랐을까? 코끼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큰 몸집이다. 내스트가 활동하던 1862~1886년 대부분의 기간에 미국의 대통령은 공화당 출신이었다. 미국 정치사 전체를 봐도 그 기간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4명 더 많은 대통령을 배출해 왔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공화당은 중도를 포함해 다소 보수적인 집단을, 민주당은 역시 중도를 포함해 보다 진보적인 집단을 대변한다. 코끼리가 상징하는 공화당은 크고 노숙한 대신 결코 활발하게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는 않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보수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랜 기간 확립된 제도와 질서의 가치를 믿는 성향이다. 이어 내려오는 것에는 그럴 만한 지혜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수도 있고, 살아남은 것이 강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관습이나 관행의 우월성을 신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보수주의자가 되는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이끈 총리 윈스턴 처칠은 많은 명언을 남겼는데, 그중에는 이런 말도 있다. “나한테 젊은 보수주의자를 데려온다면, 그 사람은 심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나한테 나이 든 진보주의자를 데려온다면, 그 사람은 두뇌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이 말에 담긴 처칠의 직관은 정치·사회적 성향이 연령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연령대에 따른 선호 정당의 차이가 꽤나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태어난 시점에 따라 살아온 시대 상황이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다. 우리나라처럼 급격한 정치·경제·사회적 변화를 겪은 나라에서는 이러한 세대 간 차이가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둘째 설명은 같은 사람이라도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처칠이 다소 과장해서 말한 현상이 이것이다. 가장 흔한 원인은 많은 경우에 사회 생활을 통해 크든 작든 기득권이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의 제도와 질서 하에서 지켜야 할 것이 생긴 사람은 이를 흔드는 일체의 변화를 경계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와 관계없이 보수를 지지할 만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이 있다. 위험이란 일반적으로 신체나 생명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것을 일컫지만, 경제학에서 위험은 불확실한 상황과 거의 같은 뜻이다. 즉, 위험을 회피한다는 것은 단순히 눈 앞의 위해 요소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장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취하는 행동까지 의미할 수 있다. 미래가 불확실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가능한 한 이를 줄이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흔히 관찰된다. 안정된 직장을 바라고 공무원 시험에 청년들이 몰리는 현상도 그중의 하나다. 불확실성을 꺼리는 사람들에게 변화에 신중한 보수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선택일 수 있다.


정치가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움직인다면 사람들은 이로부터의 불확실성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게 된다. 안정된 제도적 환경에서 시민들이 미래를 꿈꾸고 설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보수 정치가 구현할 수 있는 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이때까지 확립된 제도와 질서가 사람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미래를 지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줄 수 있는가다. 보수정당의 태생적 한계야 바꿀 수 없더라도,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 지치고 미래도 없다고 느낀다면 비록 변화에 느린 보수지만 본연의 존재 의의를 찾아 바뀌어야 할 때인 것이다.


보수주의는 정립된 이론이나 이념이 아니다. 안정을 바라는 인간의 본성이 떠받치는 육중한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사회에 긍정적으로 퍼지려면 변하지 않을 가치와 시대적 요구의 접점에 반석을 놓아야 한다. 헌법에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했다. 자유와 창의가 발현되려면 시작이 공평하고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요구가 아닐까. 격동이 예고된 2017년, 진정한 보수의 반석이 놓이기 기대한다.


민세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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