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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고 싶은 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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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른 살의 보습학원 강사 '김정은'이 첫사랑을 닮은 열입곱 살 제자에게 통제 불가능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날 밤, 그녀는 동거하는 남자 친구의 침대 위에서 나른하게 '유영'하는 자세를 취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애와 자고 싶어." 이 놀라운 고백에 대한 동거남의 반응이 더 산뜻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시선을 모니터에 두고 태연히 말한다. "혹시 네가 잊었을까봐 하는 말인데, 지금 네 나이는 영양제나 건강 보조제 같은 걸 챙겨 먹어야 하는 나이라고."

정확히 그 순간부터 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건 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관계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타오르는 열정까지 수용할 수 있는 다정하고 평화로운 연인 관계라니, 이건 말도 안 되는 판타지다. 하지만 우리의 돈키호테가 낡은 갑옷과 무기로 무장한 채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용감한 사람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을 때 내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던 것처럼 그 불가능한 관계 앞에서 내 가슴은 또 그렇게 두근거렸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사랑니'의 두 사람을 생각했다. 감독은 그들의 동거가 어떤 우여곡절 끝에 그런 수준(혹은 지경)에 이르렀는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토록 이상적으로 그려진 동거남이 어떤 일을 하며, 동거녀의 새로운 연애를 어떤 심정으로 관망하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고교 동창이었고 남자가 한 번 이혼한 경력이 있다는 사실만 알려준다.

나는 이런 '불친절한' 감독을 대신해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두 사람의 역사에 대해 상상해 보곤 한다. 편의상 여자를 J로 남자를 Y라고 해두자.

나이가 서른이니까 J와 Y는 제각각, 어쩌면 두 사람이 함께 도파민과 아드레날린이 제멋대로 분비되는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황홀경을 적어도 한두 번은 경험했을 거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제각각 가장 강렬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의 파도를 타고 Y는 결혼을 했고 J는 동거를 했다는 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들도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세월이라든가 혹은 친밀감과 함께 어떻게 시들어 가는지 목격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살 수 없었던 건 그들이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 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라든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같은 연애소설을 더 신봉하는 부류였다는 거다. 결국 Y는 이혼을 하고 J는 동거남을 떠난다. 그리고 결혼과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관계를 믿지 않는 남과 여로 한동안 외롭게 지낸다. 그리고 신들의 장난으로 다시 만난 J와 Y는 결혼이든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든 사랑을 독점하고 사람을 구속한다는 점에서 똑같다며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인다.

여기까지다. 그리하여 그들이 단순한 룸메이트 관계로 동거하게 됐는지 아니면 간혹 침대도 함께 쓰는 연인 관계로 살게 되었는지 묻지 마시길. 나머지는 두 사람만의 '비밀'에 부치고 싶다. '비밀'이 없는 삶은 비참해지기 마련이니까.

◆약력=라이선스 패션지 'BAZAAR'의 피처팀 디렉터, 저서 '뷰티풀 몬스터'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김경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