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조건 정정보도 요구'에 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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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발효된 언론관계법(신문법.언론중재법)의 정당성 논란이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서울중앙지법 언론전담 재판부가 "언론중재법(언론중재 및 피해구제에 관한 법률) 일부 조항에 위헌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제청했기 때문이다. 언론중재법 가운데 언론사의 고의.과실.위법성을 불문하고 정정을 요구하는 대목이 헌법정신에 어긋날 수 있다는 법원의 판단이다. 이미 헌재엔 언론사 3곳이 언론관계법 전반에 걸쳐 낸 헌법소원이 계류 중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법원 결정이 언론관계법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추정한다.

◆ 위헌심판 제청 내용=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5부(부장판사 김선흠)는 19일 새 언론중재법에 포함된 일부 조항(14조2항과 15조4항2호, 31조 뒷부분, 26조6항과 27조1항)에 대해 "위헌 소지가 있다"고 결론 내리고 헌재에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문제 조항들은 모두 정정보도 관련 조항이다. 골자는'언론사의 고의나 과실, 위법성 여부에 관계없이 정정보도를 청구할 수 있다''정정보도 재판은 (가처분 절차와 같이) 신속히 진행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언론사가 권력형 비리를 취재.보도했다고 하자. 대부분의 비리 의혹 당사자는 "사실과 다르다"며 법적 대응에 나선다.

이 경우 명예훼손 사건 등에선 언론사의 면책(위법성 조각) 사유가 있다. 공익을 위한 보도였고, 충분한 취재를 거쳐 나름대로 사실로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면 말이다. 언론사가 고의나 악의적으로 보도한 것이 아닐 경우 상당부분 면책이 인정돼 왔다. 이런 면책은 공공의 이익과 국민의 알 권리, 나아가 사회 정의 구현이라는 언론의 노력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발효된 새 언론중재법에 따르면 언론사는 정정보도 요청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고의나 과실, 위법성 여부와 무관하게 정정보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새 언론중재법은) 언론기관에 과도한 사실 조사 의무를 부담시켜 의혹 제기 차원의 언론보도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것"이라며 "언론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는 것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재판부는 언론의 역할을 설명하기 위해 '줄기세포 진위 논란' 보도를 예로 들면서 "언론의 의혹 제기 보도는 사회적 이슈로 커져 자유로운 논박을 벌이는 과정에서 '진실'이 발견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 헌법재판소 결정에 영향 줄까=이번 법원 결정 자체가 "언론관계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일부 내용이지만 법원이 그간 위헌 시비가 일었던 조항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번 재판부는 언론관계법의 다른 조항들에 대해선 판단하지 않았다. 심리 중인 사건과 직접 관련된 조항만을 문제 삼은 것이다. 재판부는 국가정보원이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정정보도 사건을 맡고 있다.

학계.법조계는 이번 법원의 결정이 헌법재판소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 시민이 내는 헌법소원에 비해 법원의 위헌심판 제청은 받아들여지는 확률이 높다. 한국외국어대 문재완(법학과) 교수는 "이들 문제 조항에 대해선 이미 일부 법학자와 법조인들이 문제를 제기했다"며 "고의.과실.위법성이 없는데도 언론사에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법.제도는 선진국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했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이번 법원의 결정이 언론중재법 정정보도 조항 외에 지난해 만들어진 언론관계법 전반에 걸친 위헌 논란(위쪽의 '논란 조항' 요약 참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대목이다. 헌재엔 언론관계법 전반에 대한 위헌청구소송이 여러 건 걸려 있다. 환경건설일보와 동아.조선일보는 지난해 2월.3월.6월 언론관계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지난해 7월 전원재판부에 회부돼 심리 중이다. 이번에 법원이 제기한 위헌심판 건의 경우 기존 사건들과 병합심리될 것으로 보인다.

◆ 외국의 사례=프랑스.독일.영국 등 많은 선진국에서도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법의 정당성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대부분 '위헌' 으로 결정났다. 프랑스의 경우 좌파 미테랑 정부가 1984년 '언론사 집중방지와 투명성 다원성 보장을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 한 신문사의 시장 점유율을 20%로 제한하고, 경영자료를 정부에 보고하는 내용 등이 골자였다. 이에 대해 부분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독일에서도 편집규약을 강요하는 조항 등이 위헌 판단을 받았다.

김택환 미디어 전문기자, 이상복 기자

*** 언론관계법 논란 조항

1. '시장지배적 사업자' 추정 (신문법 17조)

◆ 공정거래법상 시장지배적 사업자 추정 기준(3개사의 시장점유율 75% 이상)을 특별한 근거 없이 신문산업에만 차등 적용. 헌법상 과잉입법 금지에 위배. 헌법상 평등원칙에도 어긋나. 또 신문 단일시장만 규제하는 선진국은 없어.

2. 경영자료 신고 및 공개 조항 (신문법 16조)

◆ 신문사를 포함해 일반 기업은 경영자료를 과세당국에 제출. 그러나 특별법을 제정해 신문기업에만 다시 경영정보를 보고하게 한 것은 헌법상 평등원칙에 위배. 정부를 감시해야 할 언론의 경영자료를 대부분 노출할 경우 본연의 비판 기능을 위축시킬 수 있음.

3. 신문.방송 겸영 금지 (신문법 15조)

◆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신문.방송.통신.인터넷 등 미디어 간 통합이 세계적 추세. '정치적 이유'로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금지하는 것은 시대 흐름에 역행. 신문사가 방송과 뉴미디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하게 통제하는 것은 과잉규제.

4. 언론중재위원회와 제3자가 언론사에 시정권고 (언론중재법 32조)

◆ 법정기관인 언론중재위원회가 직권으로 언론사에 시정권고를 하게 한 것은 헌법상 표현 및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음. 피해자도 아닌 제3자에게 시정권고 신청권을 부여한 것은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 시민단체 등 타권력기관이 이를 악용할 소지도 있어.

5. 정정보도 청구의 요건 (언론중재법 14조 2항 등)

◆ 언론사의 고의.과실이나 위법성이 없어도 정정보도를 해야 한다는 규정은 언론 자유를 침해하고 언론의 진실규명 노력을 위축시킬 수 있음. 법원도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에서 위헌소지 있다고 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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