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감정 득볼생각 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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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재작년 영국에 반년쯤 머무르면서 무척 놀란 것이 있다. 분명이 한나라로 되어 있는데 실은 한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왕도 하나고, 의회도 같고, 따라서 중앙정부도 하나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즈·북아일랜드의 네나라가 함께있는 느낌이었다. 국제대회에 나가는 축구팀까지 4개로 되어 있는 정도니까.
같은 기독교지만 지역마다 종파가 다르고 말도 다르거나 독특한 단어와 억양이 남아 있으며, 교육제도와 화폐 발행도 제각기였다.
내가 머무르던 스코틀랜드에선 잉글랜드와 그곳 사람들에 대한 반감이 강하고 중앙정부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다. 완전한 독립까지는 아니지만 별도의 의회를 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로 지역 감정이 강하다.
영어뿐 아니라 스페인의 경우도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한 카탈로니아와 갈리시아·바스크등지의 독립적 성향이 심각하다. 이들 지역의 분리주의적 성향은 스페인내전의 한 원인을 형성했었고 바스크분리주의자들의 테러행위는 지금도 골치 아픈 문제다.
이 비슷한 지역적 갈등을 지닌 나라는 지구상에 수없이 많다. 이들 나라들의 지역적 갈등은 대개 인종이나 민족·언어 또는 종교문제에 연유한다.
이런 나라들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갈등요인이 없다시피한 축복받은 나라라 할수 있다. 단일민족에 같은 언어를 쓰고, 종교간 갈등의 유산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엔가 국민적 일체감과 국가 공동체에 대한 애착마저 좀먹는 지역감정의 틀이 영·호남사이에 깊고 넓게 패어가고 있다. 지역감정에 휩쓸리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은 설자리를 잃고 온통 원색적인 감정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보통때는 꽤나 합리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도 지역과 관련된 문제가 되면 딴 사람이다 싶을 정도로 달라져 낭패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호남의 대학생을 대상으로한 한조사에 따르면 62.8%의 대학생이 영·호남간 지역감정이 심각하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또 74.5%가 지역감정과 관련되는 소문을 별다른 확인없이 수용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지역감정이 덜 하다고 보는 젊은 대학생들마저 이정도니 일반 지역민들의 감정은 미루어 짐작할만하다.
실제로 정가에는 앞으로 대통령선거에서 누가 누구와 대결하면 해볼만하고, 누구와 붙으면 더 어렵다느니하는 지역감정이 전세된 얘기가 밑도 끝도 없이 오가고 있다.
모두 걱정은 하면서도 급해지면 지역감정 유발을 불사했던 행태가 그동안 지역감정을 악화시킨 원인이었다. 영·호남간의 지역감정은 신라·백제의 항쟁과 일제의 지역이간 시책 등에 뿌리를 두고있긴 하지만 63년 대통령선거때까지만 해도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호남 푸대접」으로 표현되는 제3공화국 이후의 인재 충원 및 경제개발 혜택의 불균형, 71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의 지나친 지역감정 이용, 80년 광주사태로 악화일로의 길을 치달았다. 그 심각성은 영·호남으로 짝 갈린 제1야당의 양대 게파 분포만 봐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서로 걱정도 하고 얘기도 통하는데 일단 집단간이 되면 절벽처럼 가슴이 막히는 지역감정-. 이것을 완화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답답한 마음에서 비영·호남출신 대통령이 나와야 해결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 유력한 여·야당의 대통령 후보감 3명이 모두 영·호남출신인 현실에선 백일몽일 뿐이고,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바로 이거다 할만한 묘방이 없는데 바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다만 그동안 지역감정을 악화시켜온 원인에 비추어 몇가지 완화방안을 생각해 볼수 있겠다.
첫째, 지역감정의 존재 자체를 쉬쉬만 할게 아니라 정면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본다. 지역감정이 국가발전과 국민적 일체감에 치명적이란 인식을 널리 확산시켜 유발요인 제공자에게 도덕적 규탄이 따르도록 해야 한다.
둘째, 지역감정의 원인이 되었던 인재충원과 경제개발혜택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노력과 함께 광주사태에 대한 올바른 평가, 피해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등이 강구되어야겠다. 이러한 실질적인 문제가 실제로 개선되어야만 지역감정이란 불행한 집단심리가 해소되는 단서가 열리게 된다.
셋째, 영·호남간 교류의 확대, 특히 지역감정이 강한 전남과 경북의 교류가 확대되는 것도 한 방법이란 견해가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의 부정적이 아닌 긍정적 역할이다. 그동안의 정치는 목전의 이득을 위해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부정적 원인을 제공해온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지역감정덕을 보려는 생각은 아예 발상부터 버릴때가 되었다. 그렇지않은 정치인은 국가분열을 심화시켰다는 역사의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71년의 대통령 직접선거는 불행하게도 지역감정을 악화시킨 선거로 기억되고 있다. 16년여만에 실시될 앞으로의 직접선거는 지역감정과 관련해 과연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초조하기만 하다. <성병욱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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