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학교에서는…<50>학급회의 시간이 지루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금부터 학급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주 주제는 「인사를 잘하자」입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얘기해주기 바랍니다』 반장의 학급회의 개회선언. 지난13일 하오3시 서울K고 2학년3반 교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다 한 학생이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인사를 해서 손해볼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친구를 골탕먹이다 선생님한테 들켰는데 즉시 인사를 해서 위기를 모면한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사에 너무 인색한 것 같습니다. 외국인들처럼 적극적으로 인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면 사회도 밝아질 것입니다』 『급우들끼리도 인사를 잘합시다』
채 두 마디를 넘지 못하는 얘기마저 단골발표자 4∼5명이 하고 나자 교실은 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견디다못한 반장이 발언자를 지명했다.
『15번이 발표해주기 바랍니다』
15번 학생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뒷머리를 긁적이다 『우리 모두 인사를 잘합시다』라고 외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32번 해주기 바랍니다』32번 학생은 아예 못들은 채 고개를 숙이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반장은 회의를 진행시키려 진땀을 흘리고 있었으나 사실 학급의 3분의2는 숙제를 하는등 딴전을 피우고 있었다.
이에 앞선 학급회 간부별보고.
지도부장의 말. 『지난주엔 싸움을 하지 말자고 했는데 잘 지켜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새마을부장. 『조기청소 참석에 적극성을 가져주기 바랍니다』 미화부장. 『대걸레등 청소도구 관리를 잘 합시다. 유리창청소도 신경써주기 바랍니다』 회의때마다 반복되는 똑같은 소리. 주제발표자가 나서지 않자 마지막으로 기타건의사항 순서.
『지각했을 때 벌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운동장 수도꼭지 상당수가 고장나 있는데 벌써 여러번 얘기했지만 고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 회의시간은 50분이지만 말하는 학생이 없어 기다린 시간까지 합쳐20분만에 끝났다.
어느 때나 학급회의는 이렇게 겉돌다 끝나곤 했다.
문교부교육과정의 「자유로운 자기표현의 기회와 자율적 집단생활경험을 통한 민주시민자질 함양」이라는 학급회의 목적을 엿보기조차 어렵다.
이 학급 오군(17)은 『매주 회의주제를 반장회의에서 「타온다」』며 『회의주제부터 우리의 생활과는 관계없이 추상적이고 틀에 박힌 것이어서 관심과 흥미가 전혀없는 지리한 시간이 된다』고 했다.
회의주제를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측에서 일률적으로 하달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학기 이 학교의 회의주제는 「복강을 단정히 하자」「환경미화에 힘쓰자」「수업시간에 정숙하자」등 윤리적·추상적인 것이거나 시교위지시사항인「과외금기」「폭력배추방」「스승의 은혜」「6·25의 비극」등.
회의에선 한마디 않던 이군(17)은 『그나마 건의사항 부분에선 할 말이 많지만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거의 없어 이제는 얘기도 않는다』며 『가령 비올때는 형광등이 어둡다고 석달전부터 얘기해왔지만, 고쳐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구내매점·화장실 문제등에도 단체로 건의를 했다가「딴반은 아무말 없는데 너희만 나서느냐」는 핀잔만 듣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담임 이교사(37)는 『초임시절에는 학급회의가 발표력 신장과 민주적 소양함양에 중요하다고 보고 활성화시켜보려고 했으나 학교전체 분위기와도 관련돼 이제는 대충 때우고있다』고 실토했다.
이교사는 『애써 학생들에게 말을 시켜보면, 가령「식중독예방」주제에서 「주전자 물을 자주 갈읍시다」라고 한두마디 하고는 더 잇지 못하거나 상투적 말, 논리가 안맞는 말에 그친다』며 『회의진행에서부터 발상법까지 일일이 가르쳐야할 소재가 많지만, 우선 구조적으로 자율성이 없는 데다 다른 잡무에 시달리다보면 교사도 쉬는 시간쯤으로 생각하게된다』고 토로했다.
그나마 K고교는 나은 편이어서 아예 회의시간을 보충수업시간으로 변칙 운영하는 학교도 없지 않다.
이같은 현실에 대해 서울대 박성수교수(교육학)는 『요즘 소리높이 외쳐대는 민주화도 따지고 보면 교실에서 시작된다』고 지적, 『학교는 모든 활동이 다양한 사고와 토론을 허용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질때 민주시민양성의 도장이 될수있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이를 위해 『학교경영자는 획일지향의 교육관을 버리고, 적어도 학급회의만이라도 학생들이 흥미를 갖는 주제를 선택,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발표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하며, 교사는 각과목 수업에까지도 엉뚱하게 여겨지는 질문까지를 수용해 나가야한다』고 강조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