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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 <제1장> 하늘과 대지 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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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맥을 정벌한 덕이는 "두려워 마십시오, 화친하여 전시를 막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예 맥을 누르고 북으로 승덕에까지, 서북으로는 고북 이남으로 예와 맥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내쫓아야 합니다.
우가 말하였고 덕이가 다시 이었다.
난하 동북방과 검은강 사이의 땅은 청구가 맡고 난하 서북방과 모래강 사이는 조선이 차지하면 어떠한가? 한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될걸.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네. 지금은 잠시 우리가 승리하여 예 맥 연합군을 깨뜨리고 요충지 몇 군데를 임시로 점령했을 뿐이야. 그런데 언제까지나 군사적 방침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둘 수는 없는 법이라네. 군비도 많이 들고 또한 이제 곧 농사철이 돌아오면 우리는 철수해야 하네. 백성을 다스리는 일은 싸움보다는 훨씬 어려운 일이야.
덕이가 다시 말하였다.
이러면 어떨까. 예와 맥이 다시는 서로 손을 잡지 못하도록 갈라 놓는다면 우리는 뒤를 든든하게 해둘 수가 있지 않은가. 예는 강으로 막혀 있어 맥의 도움이 없이는 동쪽과 남쪽을 친입해 오지 못하네. 맥이 우리의 편을 들게되면 예는 맥과 싸우느라고 많은 힘을 소모하게 되지. 그때마다 청구와 조선은 맥에 원병과 약간의 양식을 보내어 도와주면 훨씬 수월하지 않겠나? 그도 좋은 방법이긴 하네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한의 회의를 꼭 다시 열어야만 한다네.
한배가 말했지만 덕이는 별로 믿지를 않았다.
구한이란 이미 오래전의 얘길세. 그 어느 부족들이 단웅 검의 승계를 인정하겠나? 한배는 노여움을 꾹 참고서 나직하게 덕이에게 되물었다.
우리가 이와 입술 같은 사이가 되어 맹약을 맺고서도 자네는 신시 이래의 조선 대성읍이 이어온 올바른 검님의 승통을 인정하지 않겠단 말인가? 일찌기 우리의 대읍에서 각부족들의 회의가 있으면 반드시 응하겠다고 한것이 누구인가? 물론 나는 자네와 약속을 했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밝 종족의 각 부족 지파들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던 사람은 누구인가? 자네가 아닌가? 나는 우선 그런 뜻에 동조하였고 부족들을 통합하고 큰 힘을 이루려면 먼저 예 맥을 꺾어 서북방의 근심을 덜고, 강을 건너 당요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저 동쪽 너른 천지의 숙신을 정벌해야 될걸세. 이제 맥의 대읍과 크고 작은 마을들을 우리 군사가 휩쓸고 맥의 큰한과 장수들은 예 땅으로 달아났으니 좋은 기회가 아닌가. 맥의 호족 가운데서 우리말을 들을 자를 큰한으로 뽑아 동맹을 맺으면 일단 예의 영향력을 제거할 수가 있잖은가.
덕이 말하였고 한배가 간곡히 일렀다.
자네의 생각은 알겠다니까. 그러나 보게. 청구와 조선이 피를 발라 맹약을 나눈 사이인 것처럼 예와 맥도 가장 가까운 부족일세. 자네의 뜻은 얼핏 생각하면 교묘한 듯 하지만 실상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아. 예 맥의 연합군이 이미 출정 병력의 태반을 잃고 혼지검이 났으니 다시 관경을 넘보지는 못할게야. 우리는 그들과 강화를 하는게야. 그대신에 청구와 조선에서는 저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요충지를 우리에게 내주도록 요구하잔 말일세.
두 큰한의 의견이 엇갈린채로 합치점을 찾지 못하고 있더니 상설이 덕이를 불러 은밀히 아뢰었다.
큰한께서는 더 이상 조선섭정과 갑론을박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그는 벌써부터 조선 검의 바른 숨통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한은 제각기의 풍토와 습속에 따라 천하에 갈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통일은 조선의 검을 내세워 저희 위주로 하겠다는 생각이지요. 이제는 그와 같은 영막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날더러 먼저 한배와의 신의를 저버리란 말이오? 덕이의 말에 설은 냉소를 던졌다.
큰한께서는 일찌기 조선 섭정을 살린 그의 은인이십니다. 또한 이번 출명도 조선과 고죽 옥저의 위기를 도와주기 위하여 많은 군량을 소모하고 병력을 모아 달려왔던 것입니다. 만약에 조선의 주장대로 예와 맥의 큰한을 대읍에 불러 단웅 검의 큰한이라고 정하고나면 회의의 주도권은 결국 섭정인 한배가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잔뜩 소모만 하고 나서 겨우 북방의 토성 한군데를 차지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지금 소년 선비 시절의 의리를 따질 때가 아닙니다. 신의가 없는 것은 오히려 조선족입니다. 어찌하는게 좋겠소?
조선은 이미 예 맥의 요층지인 서무와 이곳 희봉 성을 차지했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도움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예의 북방에서 승덕을 점령했고 이미 맥의 대읍인 평천을 휩쓸었습니다.
조선의 강화 모임에 참석하여 얻을 것이 무엇입니까. 큰한께서는 짐짓 검은강 너머로 군사를 퇴각시켜 놓고 나서 저희들만 거느리시고 조선 대읍으로 가겠다 하십시오. 사신은 조선족에서 예의 대읍으로 보내겠지요. 우리는 그대로 북상하여 맥의 대읍에 머물러 맥의 호족들과 따로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맥의 호족들 가운데서 새로 큰한을 뽑아 우리와 강화를 맺게 하고 군대를 주둔시킵니다. 일찌기 조선이 청구에 와서 저질렀던 것과 똑같은 일이지요. 그 다음에 조선쪽과 담판하면 별로 믿질 게 없습니다.
덕이는 상설의 말을 옳게 여겨 한배에게 대읍에서의 예 맥 청구 조선 큰한의 강화회의에 참석하겠으나 군사를 검은강 너머로 퇴각시키는 것이 청구쪽에도 후환이 없겠다는 핑계를 대고서 희봉 성에서 빠져나왔다. 청구군은 검은강을 건너지 않고 모래강과의 사이로 열린 들판을 따라서 똑바로 북상하였다. 평천은 아직도 청구군이 휩쓸었던 불탄 폐허가 남아 있었으며 대군이 들이닥치자 맥의 잔여 병럭은 토성안으로 들어가 통나무 문을 닫아 걸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장 홀이 큰한 덕이의 지시를 받고 장수 몇명을 거느리고 토성의 성벽 아래로 말을 달려 접근했다. 홀은 성위쪽을 향해 고함을 쳤다.
맥의 장수와 병졸들은 듣거라. 우리는 너희 성문을 대번에 깨뜨리고 홍수처럼 밀려 들어갈 수가 있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성을 무너뜨리고 들어가면 필시 우리의 강졸들은 분기를 참지 못하여 성안의 모든 사람을 살해할 것이다.
이는 청구의 큰한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며, 맥 백성들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만약에 너희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 병사 한사람도 다치지 않으려니와 호족과 백성들의 재물이며 인명은 한줌 터럭까지도 상하지 않게 될 것이다. 보라, 너희들의 큰한은 두려워 떨며 예땅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우리 큰한께서는 이를 가슴 아프게 여기시고 맥에다 진정 백성을 사랑하는 호족을 큰한으로 정하여 세우고 이를 지켜주실 것이다.
외쳐 알리기를 끝내고 비장 홀이 물러서더니 단지의 죽이 끓을만한 때가 지나 굳게 잠겼던 통나무의 성문이 조금씩 열렸다. 토성 위에 한 장수가 나타나 군기를 쳐들어 보이더니 무릎 위에 대고 꺾어서 성벽 아래로 던졌다.
먼저 기병 백여기와 보병이백여가 정연하게 행군하여 달려 들어갔고 문루와 성벽 위에 그들의 창검이 번쩍였다. 본진은 천천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보병들은 이미 무장을 풀어버린 맥의 수비군을 성내 빈터에 모았고 기병들은 외성 안쪽의 초가와 돌담사이로 흩어져 샅샅이 뒤졌다.
성은 잠깐동안에 완전히 청구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덕은 막료들을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가 내성 밖에서 기다렸다. 내성의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비단 옷을 입은 호족들과 그 식솔들이 몰려나와 땅에 엎드렸다. 덕이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그들과 맞절을 올렸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 손을 모으고 노인들을 향하여 공손히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청구가 맥땅에 쳐들어온 것은 우리가 먼저 욕심을 내거나 해할 마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청구는 일찍이 검은강 건너편에 넓고 기름진 고장을 관경으로 정하여 평화롭게 살아오더니, 처음에는 조선의 친입을 받았다가 강화를 맺고 형제의 의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가 탐심을 내어 우리의 북방과 조선과 옥저, 그리고 고죽을 얻고자 하여 맥의 도움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는 수없이 이곳 맥땅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침범을 당하여 스스로 변방을 지키고자 출병한 것입니다.
맥의 큰한이란 자는 예족의 충복이 되어 제 백성과 장졸을 헛된 싸움에 끌어들이고도 이제는 달아나 예의 대읍에 쥐새끼처럼 숨었더니, 조선과 강화하여 다시 그 수족이 되려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 가운데 진정한 큰한이 나와서 청구와 화평하는 맹약을 맺고서 닥쳐올 화를 방비하자는 것이지요.
덕이는 설이나 유의 한과 발의 한 등등과 의논했던 대로 그들을 설득하였고, 곧 내성에 들어가 맥의 호족들과 의논하였다. 이어서 군대를 외성에 주둔시키고 덕이는 내성 밖의 빈터에 영막을 치고 저들이 뜻대로 회합을 끝내기까지 참을성있게 기다렸다. 영막 밖에는 마침 큰한 덕이에 관한 소문이 돌아서 성 안에서 살던 하호며 노비들의 대표가 십여명 찾아와 덕이에게 하소하였다.
우리도 부족은 다를지언정 밝의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우리를 노예로 남겨두지 마시고 차라리 전사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덕이가 홀이를 시켜 넌지시 알아보게 하였더니 하호와 노예는 천여명이나 되었다. 맥의 대읍에는 대략 만오천여의 인구가 산다 하였으니 열명에 한명 골이 될듯 하였다. 덕이는 이들을 대읍 수비군의 일부로 쓰고자 하였고, 다시 천여 병력을 내어 몇몇 강수들과 함께 대읍 수비군으로 잔류시킬 예정이었다.
드디어 사흘이 지나서 맥의 새로운 큰한이 뽑혔다. 덕이는 그와 더불어 호족들과 마주앉아 강화를 맺었다. 대읍의 통치에 자리가 잡힐때까지 청구군은 맥의 대읍에 머물러 있었는데 벌써 이 소식은 예땅과 조선땅에 자세히 알려졌다. 섭정 한배의 막료들은 제각기 화를 내며 진언하였다.
이는 청구가 우리를 속이고 배신한 것입니다. 구한의 전통에 따라서 그를 쳐야만 합니다. 지금 예는 우리와 연합하여 청구를 무찌르고자 할 것입니다.
예와 맥의 잔여병력, 그리고 고죽 옥저 조선이 에워싸고 쳐들어가면 맥은 삼시에 점령할 수 있으며, 청구의 변방 요충도 우리 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한배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더니 비장 우를 불러들였다.
너는 이 길로 맥의 대읍에 가서 새로운 큰한이 오른 일을 경하하여 주어라. 또한 덕이에게는 내 생각이 모자랐음을 알리고 사과하도록 해라. 귀한 선물도 잊지 말고 가지고 가거라.
주위의 막료들은 물론 우는 더욱 놀랐다.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한배는 당장이라도 검은강을 건너 청구의 예전 대읍을 점령할 기세였던 것이다. 우는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청구의 배신을 용납하십니까? 누가 배신을 했단 말인가? 우는 중얼거렸다.
청구와 조선은 함께 예와 맥의 큰한을 우리 대성읍에 불러다가 검님께 븍속시키는 화의를 맺자고 약속했습니다. 청구는 미리 맥의 대읍을 점령할 야심이면서도 짐짓 응하는체 하고서 약속을 어기고 우리를 속이지 않았읍니까? 한배는 큰소리로 웃었다.
그가 아직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다. 다만 맥의 큰 한을 새로 세웠을 뿐이다. 처음에 우리 대 성읍을 강화의 장소로 정했던 내 생각이 모자란 것이었다. 맥의 평천에서 강화하겠다고 가서 전하라. 그러나 예는 제외한다. 조선은 고죽 옥저의 한을 동반하고 청구는 유와 발의 한을 동반할 수 있으며 진번 임둔의 한도 따로 부른다. 조선과 청구와 맥은 이제 서로 관경을 다투거나 욕심을 내지 않을 것이며 예가 먼저 화의를 청하여 오기 전에는 아무도 따로이 약조를 맺을수 없을 것이다.
선물을 가득 실은 수레와 더불어 우가 맥으로 떠나고 나서 고죽의 한은 조심스럽게 한배에게 물었다.
이는 청구가 강대해짐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징별은 커녕 신시의 엄숙한 숨통을 받은 자리에서 그를 천하에 인정받도록까지 하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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