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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듯, 때론 거칠고 빠르게…감각의 절정 보여준 조성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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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3·4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조성진 독주회가 열렸다.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 후 국내에서 열린 첫 독주회였다. 다음 한국 독주회는 5월 6일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이다. 티켓 판매는 3월 중으로 예정돼있다. [사진 롯데문화재단]

3·4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조성진 독주회가 열렸다. 2015년 쇼팽 콩쿠르 우승 후 국내에서 열린 첫 독주회였다. 다음 한국 독주회는 5월 6일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이다. 티켓 판매는 3월 중으로 예정돼있다. [사진 롯데문화재단]

언뜻 들으면 실수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4일 오후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조성진(23)의 독주회. 쇼팽의 전주곡 24곡 중 네번째 곡이었다. 왼손으로 치는 첫 화음 네 개의 소리가 다 달랐다. 어떤 화음에서는 한 음 정도 소리가 빠져버렸고 또 어떤 화음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가 작았다. 악보에는 분명 똑같이 그려져 있는 화음 네 개다.

콩쿠르 우승 후 첫 귀국 독주회
규칙 살짝 흐트러뜨린 쇼팽 선율
‘나의 연주는 본능적’ 세상에 선포
티켓 온라인 판매 9분 만에 매진
공연 후 사인회에 800여 명 줄 서

의아한 부분은 또 있었다. 17번째 전주곡 후반부는 소리가 지저분했다. 조성진은 음이 울리도록 발로 밟는 페달을 오랫동안 밟은 채 떼지 않았다. 화음들이 서로 섞였다. 피아니스트들은 이처럼 게을리 페달 바꾸는 것을 금기로 여긴다. 3번곡, 16번곡은 너무 빨랐다. 그렇지 않아도 소리가 많이 울리는 롯데콘서트홀에서 이같은 속주는 음표들을 무디게 만들었다. 너무 빨라서 음 하나하나를 제대로 식별할 수 없을만큼 속도를 올려 잡았다.

희한한 것은 규칙을 어긴 결과가 독특하게 아름다웠다는 점이다. 일정하지 않은 화음은 청중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게으른 페달 때문에 생긴 뜻밖의 불협화음은 묘한 해방감을 선사했다. 따라가기조차 힘든 속도는 음악이 언제 시작해서 끝났는지 기억할 수도 없는, 마치 환각같은 경험을 하게 했다. 조성진이 쇼팽을 연주하는 내내 청중이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이유다.

조성진은 아이돌급 인기를 누렸다. 공연 후 롯데콘서트홀 로비에서 열린 사인회에 800여 명의 팬이 몰렸다.

조성진은 아이돌급 인기를 누렸다. 공연 후 롯데콘서트홀 로비에서 열린 사인회에 800여 명의 팬이 몰렸다.

청중을 집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은 연주자는 자유로웠다. 악보는 이미 수없이 연구하고 해석해 곱씹어 놓은 상태였고 대형 콩쿠르, 수없는 세계 무대를 경험한 손가락은 연주자의 통제를 완벽하게 따랐다. 하지만 가장 돋보였던 것은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청중이 예상치 못한 소리가 툭툭 튀어나와 신선한 효과를 거뒀다. 쇼팽에서 아주 낮은 음을 연주할 때는 마치 전자음악이라도 되는 듯 무시무시한 사운드를 냈다. 건반의 저 밑바닥까지 훑으며 음향의 한계를 시험했다.

3·4일 공연은 2015년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 후 조성진의 첫 한국 독주회였다. 한국인 최초의 우승자로 주목을 받긴 했지만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잘 치는 피아니스트는 수없이 많은 게 현실이다. 이제 관건은 잘치고 못치고가 아니라 본인의 스타일이 있는가다. 조성진은 이번 독주회에서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연주라는 자신의 스타일을 선포했다. 음악을 일부러 흐트러뜨리거나 규칙을 살짝 어기고, 선율을 연주할 때 미세하게 속도를 당겼다 놓는 것은 계획보다는 본능에 의한 것으로 보였다.

감각에 의한 연주는 같은 곡도 칠 때마다 다르게 디자인했다. 3일 연주한 슈베르트 소나타는 마치 러시아 음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휘몰아쳤다. 기존 연주자들의 슈베르트에 비해 거칠었고 선이 굵었다. 멜로디 하나하나를 공들여 노래하느라 큰 굴곡이 생겼다. 하지만 4일엔 같은 곡을 보다 조심스럽게 연주했다. 속도도 느려졌고 음표는 하나씩 또박또박 들렸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쇼팽의 발라드 3번엔 여러 음으로 된 화음을 연속으로 치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 직전 부분까지 한없이 부드럽게 노래하던 조성진은 속도를 확 높이더니 이 난해한 부분을 한숨에 해치워버렸다. 여기를 어떻게 소화할지 지켜보던 청중은 의외의 해법을 경험했고 그후 조성진의 감각에만 의지한 채 음악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연주자가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주도권을 쥔 것이다.

이번 독주회 티켓 4000여장은 지난해 11월 온라인 판매 9분 만에 매진됐다. 공연 당일의 분위기도 대중음악 공연장 수준으로 뜨거웠다. 이틀 모두 청중 800여명이 콘서트홀 로비에 조성진 사인회 대기 줄을 길게 그렸다. 공연 시작 한시간 전엔 프로그램 책자 구입을 위한 긴 줄도 생기기 시작했다. 공연을 주최한 롯데콘서트홀은 3일 1000부 준비했던 프로그램북을 4일 700부 더 찍었고 모두 판매했다. 유료관객 숫자는 지난해 8월 롯데콘서트홀 개관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대형 국제 콩쿠르 우승이란 소식이 이 뜨거운 기운을 촉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열기를 지속시킬 힘은 조성진의 감각이라는 것을 두차례 독주회가 증명했다. 어려운 해석보다는 본능적인 풀이, 구조적이라기보다는 그저 아름다운 노래라는 ‘조성진풍’을 뚜렷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독주회 다음날인 5일 곧바로 한국을 떠나 대만·일본 무대에 서고 2월엔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하게 될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고유한 스타일만큼 강력한 무기는 없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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