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작가전] 시뮬라크르 #7. 시선은 위로부터 왔다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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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해진 뒤에야 푸코와 태수가 돌아왔다. 루는 두 사람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일어나서 바로 옆에 누운 시몬을 더듬거리며 만져봤다. 진즉에 깨있었는지 시몬이 자기는 괜찮다는 듯 루의 손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누군가가 호롱에 불을 붙이자 잠들기 전과 다름없는 방안 풍경이 어둑하니 루의 눈앞에 떠올랐다.
태수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루는 벽에 걸어 두었던 긴 칼을 내려서 닦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칼의 모양과 손잡이의 문양이 달라져 있었다. 원래 진한 회색빛이었던 칼자루의 색깔도 약간 더 푸르스름해진 듯했다. 시몬의 상처를 살피던 푸코의 눈앞에 칼을 디밀어 보이며 물으니 푸코가 또 시작이라면서 루의 뒤통수를 때렸다. 루는 칼을 손에 쥐어들고 불빛에 비춰봤다. 자루도 꼼꼼히 다시 살폈다. 원래 이런 모양이었던가?
언젠가 일어났던 일이 또 일어나고 있는 듯 기시감이 들며 낯익은 사물들이 순식간에 낯설어질 때가 있었다. 시공간이 아주 조금만 비틀어져 미세하게 다른 차원의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간 듯 익숙한 공간들이 낯설고 불안해질 때, 루는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느꼈다. 경계 태세를 갖추고 주위를 둘러봐도 그럴만한 대상이 없었다. 거듭 확인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한동안 지속됐다. 어쩌면 시선은 위로부터 왔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내부로부터. 루는 시몬이 믿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진짜 미친 거 아냐?
저녁을 먹으면서도 태수는 트럭을 가지러 갈 때 자기도 데려가라고 졸랐다. 루도 푸코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지금 B지구에 가신 게 헬리콥터 때문이거든.”

“헬리콥터?”

드디어 반응을 보이는 푸코 쪽으로 태수가 얼른 돌아앉았다.

“응, 형. 그게 말이야.”

하늘을 나는 자동차라고 했다. 서쪽으로부터 출몰하는 비행편대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만큼 높이 날지 못하고, 그만큼 멀리 가지 못하지만 어쨌든 날 수는 있다고 했다. 풍요로운 시절부터 있었던 것으로, 현 회장이 광야의 비밀 요새에 잔뜩 모아놓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연료가 없어서 시험 운행도 못 해보고 있었는데, B지구에 대체 연료가 개발 중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어 현 회장이 직접 알아보러 간 것이었다.
푸코는 어렸을 때 많이 봤다면서 도로 시큰둥해졌지만, 루는 더 바짝 호기심이 일었다.

“하늘을 날아?”

“응.”

“서쪽의 그것처럼?”

“응.”

“그럼 우리도 서쪽으로 갈 수 있어?”

“그렇게 멀리는 못 간대.”

“쉬었다 가면 되잖아.”

“맞아. 밤에는 쉬고, 낮에만 날면.”

“연료가 없잖아.” 묵묵히 밥만 퍼먹고 있던 푸코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 연료……”

실망하는 루의 표정을 보고 다급해진 태수가 외쳤다.

“그래서 아버지가 지금 연료 구하러 가신 거라니까. 우리 집에 지도도 있어!”

“지도?”

“비밀 요새로 가는 길 말이야.”

“확실해?”

“확실하지! 예전에 군부대가 있었던 곳이래. 지하에 아주 큰 벙커도 있대. 아버지가 직접 말씀해 주신 거라고.”

“그런데?” 푸코가 되물었다.

하늘을 난다는 말에, 서쪽이라는 말에 정신이 팔려서 태수 앞으로 바싹바싹 다가앉는 루와 달리, 푸코는 그래서 지금 트럭을 수거하러 가는 것과 그 일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다.

“설마 너를 데려가면 거기로 안내하겠다는 말은 아니지?”

“그건데?”

“미친놈.”

“아, 혀엉!”

“거기까지 가서 뭐 할 건데? 아, 저런 게 있구나 하면서 구경하고 돌아와? 아님, 훔쳐? 아니 그전에, 너희 아버지가 지도를 허술하게 두진 않으셨을 테고, 태수 네가 그걸 본다고 쳐. 그쪽 지리도 모르는 네가 그걸 외울 거야? 아님, 그것도 훔쳐서 들고 나오려고? 그러고 나서는?”
루가 느닷없이 앉은 채로 태수를 발로 찼다.

“에라이!”

“루, 너도 신경 끄고 얼른 밥이나 먹어.”

“아, 몰라. 안 먹어!”

루는 들고 있던 수저도 놓고 뒤로 벌러덩 누워버렸다.

“얼른 일어나”

“안 먹는다고!”

심통이 나서 그렇게 말했지만 금세 다시 일어나 밥상 앞에 앉았다.

“보고 싶지 않아? 누구보다 먼저 하늘을 날고 싶지 않아? 나는 상관없어. 아버지가 연료를 구하면 몰고 와서 우리 집 옥상에도 한 대 세워둔다고 했어. 나는 매일도 탈 수 있다고. 그래 그러면 내가 형이랑 루랑 시몬 정도는 태워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구보다도 먼저, 제일 먼저 보고 싶지 않아? 아니다, 아주 엄청 많대. 잘하면 훔칠 수도 있을지 몰라.”
앞뒤가 맞지도 않는 말을 지껄여대며 매달렸지만 푸코와 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현 회장의 물건에는 절대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것을 이 도시 내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헬리콥터라니, 하늘을 나는 물건이라니. 가끔 그쪽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해달라면서 대가로 보내오는 것들이나 태수가 훔쳐 내오는 책과 통조림, 각종 부품들과는 차원이 다른 물건이었다.
루도 풍요로운 시절에는 하늘을 날아 대륙과 대륙을 이동하는 일쯤은 간단했다고 들었다. 바다를 통해서도, 하늘을 통해서도 가고 싶은 곳으로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대재앙 직전에 모두 하늘로 떠올랐고 바다로 나갔고,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떠밀려온 잔해를 할아버지와 함께 발견한 적은 있었지만 부품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껍데기였다. 그것도 산산조각이 나서 쓸 만한 철판 쪼가리들은 모두 없어진 후라 그 모양이나 크기도 가늠해 볼 수 없었다. 어른들은 땅을 통해서도 계속 북쪽으로만 올라가면 서쪽 대륙으로 가는 길과 만나게 된다고 했다. 물론 지표면이 뒤틀리기 전의 지형에 의하면 그렇다는 것이었다. 루는 항상 궁금했다. 그쪽에도 우리처럼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까. 아니 그쪽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이전의 풍요로운 세상에서 계속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파괴되지 않은 도시의 파괴되지 않은 사람들이 이쪽으로 자꾸 정찰기를 보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너머 어릴 때 할아버지가 얘기해주었던 태초가 시작되었다는 땅, 누떼가 살았다는 그 검은 대륙은 파괴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상태의 짙푸른 숲으로 여전히 뒤덮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쪽으로부터 날아오는 비행 물체는 몇 년째 더 낮게 접근해 오지 않았고, 그쪽을 향해 떠났던 사람들도 아직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광야를 향한 태수의 호기심과 바람은 어쩌면 서쪽을 향해 품고 있는 루의 간절한 동경과 비슷할 것이었다.

“알았어. 일단 생각 좀 해 보고. 하지만 지도를 훔쳐내 올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

“루!”

“아, 형은 좀 가만있어 봐. 루, 정말이지? 언제 출발할 건데? 뭘 가져가지? 방수포랑 식량이랑, 그래, 식량은 내가 가져올게. 루랑 형 몫까지 전부. 그리고 또, 또 뭐가 필요하지?”

“시몬이나 나아야 가지. 이렇게 혼자 두고는 못 가.”

“절대 안 돼.”

푸코가 태수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태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응, 기다릴 수 있어. 기다릴게. 날짜 잡히면 꼭 얘기해 줘. 저번처럼 또 혼자 몰래 도망가면 안 돼. 알았지?”

“대신, 걸리면 우린 무조건 튈 거야. 넌 그냥 혼자 간 거야. 절대 우리 이름을 불면 안 돼.”

“걱정하지 마. 내가 언제 그런 적 있어? 내가 의리 하나는 끝내주잖아.”

“아놔, 의리! 지금 네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는 거 알지, 루?”

“내가 아니고, 우리.”

“미치겠네, 정말.”

푸코가 투덜거리며 빈 그릇들을 챙겨 부엌으로 갔다. 태수는 잔뜩 들떠서 무얼 더 준비해야 하느냐고 계속 꼬치꼬치 물었다.

“아, 내일부터라도 미리미리 좀 갖다 놓을까?”

가만히 누워 듣고만 있던 시몬이 작은 소리로나마 킥킥거렸다. 루가 시몬 쪽을 돌아다봤다.

“이제 좀 살만하냐?”

시몬이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 보였다.
루는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알면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할아버지의 동굴에도 이상한 물건들이 많았다. 대부분 할아버지가 고치거나 새로 조립하여 만든 것이었다. 부품은 대체로 루가 광야에서 주워온 고물 중에서 푸코가 선별하여 챙겨주면 루가 다시 가져다 드렸다. 단단한 철 조각을 갈아서 만든 바늘과 구리선으로 엮어 만든 조끼로 된 갑옷, 양철을 두드려 만든 상자와 같이 소소한 물건을 비롯하여 지금은 배터리를 구할 수 없어 사용하지 못하지만 무전기라는 것도 만들어 줘서 한동안 요긴하게 써먹었다. 푸코가 시장에 가게를 내고 도시에서 이만큼이라도 자리를 잡게 된 것도 모두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할아버지가 도시에 있을 때 만들었던 물건들은 시장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그때 배운 기술로 푸코도 이젠 웬만한 것들은 혼자서도 거뜬히 만들어 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광야의 동굴로 혼자 떠나신 걸까. 조용히 해야 할 연구도 있고 푸코와 루에게 보낼 곡식을 재배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지만 루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할아버지처럼 힘없는 노인들이 살기에는 이 도시가 위험하기는 했다. 하지만 푸코와 루가 있는 한은 걱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한사코 도시로는 돌아오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광야의 동굴에서 혼자 지내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은데.

태수가 아침에 다시 오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푸코가 태수에게 소독약이 있으면 갖다 달라고 했다. 진통제라도 있으면 더 좋겠다고 했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찾아는 보겠지만 아마 없을 거라고 했다. 약 종류는 이제 창고에 두지 않고 현 회장이 따로 보관하는데, 어디에 두는지는 아들인 자신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태수가 돌아가고 잠자리에 들어 막 호롱불을 끄려 할 때, 누군가 바깥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푸코와 루는 벌떡 일어나 무기부터 챙겼다.
바로 현관문을 두드린 사람은 벌써 골목 밖으로 나갔어야 할 태수였다. 태수는 지하철역 부랑자들이 몰려오고 있다면서 서둘러 카펫을 치우고 벙커 문을 열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무기까지 잔뜩 들었는데 숫자도 제법 된다고 했다. 태수가 시몬을 업고 벙커로 내려가자마자 루는 얼른 문을 닫고 그 위에 다시 카펫을 덮었다. 그와 동시에 푸코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루도 그 뒤를 따라 뛰어나갔다.
바깥문을 나서자마자 맞닥뜨린 패거리는 지하철역 부랑자 중에서도 젊은 축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젊다고 해봐야 이미 육십을 넘긴 노인들이었다. 푸코와 루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몇 번의 칼질만으로도 선두에 선 대여섯이 피를 뿜으며 고꾸라졌다. 뒤에서 달려오던 치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도끼며 망치며 온갖 무기들을 양손에 잔뜩 움켜쥐고 있었지만 제대로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했다.
루가 활을 먹여 재빨리 등을 보이며 달아나는 절름발이의 허벅지에 첫 번째 화살을 날렸다. 두 번째 화살은 떡 진 긴 머리의 심장 쪽 등이었다. 다음 화살은 외팔이의 머리, 그다음은 한쪽 귀가 뭉개진 대머리의 목이었다. 방향을 틀어 골목의 반대쪽 입구를 향해 겨눴다. 어느새 그쪽 입구를 막고 있던 자들까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골목 안은 부상당한 부랑자들의 신음과 아우성과 튀기고 고인 핏물만 낭자했다.

“오늘 밤 잠자기는 다 틀렸네.”

푸코가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오자마자 이게 뭐야. 쉬지도 못하고.”

루는 푸코와 함께 안으로 들어와 바깥문의 빗장을 단단히 질렀다. 벽에 세워두었던 굵은 쇠 파이프를 일렬로 문에 기대 세우고, 돌덩어리를 굴려 그 앞에 고였다.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쇠 파이프들이 쓰러지며 요란하게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장치였다.

“아, 이 밤은 또 얼마나 길라나.”

하지만 루는 아직 알지 못했다. 정작 더 길고 지루할 도시에서의 생활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작가 소개   
상명대학교 문화기술대학원 소설창작학과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나무젓가락」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제2회 EBS 라디오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
단편소설집 『붉은 나무젓가락』, 장편소설 『수목원』,
그림동화 『옥상에 텃밭이 생겼어요』
옴니버스 에세이집『가족이 힘이다』『수업』『가족, 당신이 고맙습니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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