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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궤(鑄潰)의 자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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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의 법칙'은 사실 잘못 붙여진 이름이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재정고문이었던 토머스 그레셤이 쓴 '비망록'(1559년)에는 그런 주장이 들어 있지 않다. 단지 여왕한테 보내는 편지에서 "주화의 저질화가 영국 주화의 교환 비율을 떨어뜨릴 것이며 좋은 금화들이 영국에서 유출되고 있다"고 지적할 뿐이다. 그레셤의 법칙이 보통 국내 유통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정작 그레셤은 대외무역에서 발생하는 걸 본 것이다.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의 법칙'이 돼야 했다. 지동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는 '화폐론'(1517년)에서 "양질과 저질 주화가 함께 유통되면 세공업자들이 양질의 주화를 골라내 은을 녹여낸 뒤 무지한 대중들에게 팔 것이다. … 열등 주화가 양화를 몰아내기 위해 도입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폴란드 국왕에게 저질 주화를 발행해 이득을 취하라고 건의하는 학자들에게 맞서 "화폐는 왕의 법을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법을 따른다"고 웅변했다.

코페르니쿠스의 말을 잘 따른 나라가 스웨덴이었다. 구리가 풍부한 스웨덴에서는 금.은 대신 동전이 쓰였다. 그런데 액면가와 맞추다 보니 동전의 무게가 엄청나야 했다. 처음 동전을 만든 크리스티네 여왕(1632~54년) 당시 10탈러짜리 동전의 무게는 19.75kg에 달했다. 부자들은 집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지하실에 돈을 보관해야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 광범위하게 시행됐던 금본위제는 이처럼 주화의 금속 함량, 즉 내재가치가 주화에 새겨진 명목가치와 일치하는 양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주조(鑄造)와 주궤(鑄潰)의 자유다. 금의 가치가, 같은 무게 금화의 액면가보다 떨어지면 금 소지자들이 중앙은행에 금화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조의 자유다. 반대로 금값이 올라 금괴가 금화보다 비쌀 경우 금화를 녹여 금괴로 만들 수 있는 권리가 주궤의 자유다. 이를 통해 금화와 금괴의 가치가 일치될 수 있었다.

구리와 아연을 섞어 만든 10원짜리 동전이 초우량 주화가 된 모양이다. 재료비와 액면가가 같아지는 '멜팅포인트'가 무너지면서 동전을 녹여 다른 물건을 만드는 게 나은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10원 동전을 더 싼 재료로 더 작게 바꿀 예정이란다. 이미 화폐로서 가치를 잃은 지 오래지만 소지자의 주머니라도 가뿐하게 해주겠다는 서비스 정신인가 보다.

이훈범 주말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