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식의 선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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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정치의 주체는 사람이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의식이라고 볼때 정치의 수준, 정치문화의 정도는 그 나라 국민의 정치의식에 달려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물론 민주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좋은 법과 제도를 가져야 하겠지만 국민의 정치의식, 특히 정치를 담당하는 정치인의 의식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소득수준은 2천달러를 훨씬 넘였지만 우리의 정치의식이나 정치행태는 아직도 몇백달러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여야관계는 항상 흑백논리에 입각한 극한 대립을 빚기가 일쑤였고 국회는 대화와 토론의장이기보다 변칙과 파행이 판치는 대결의 장이었다.
이런 현상이 왜 빚어지는 것일까. 결국 정치인들의 정치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분석이 일차적으로 나오고 있다. 서울대 길승흠교수(정치학)는『정치엘리트의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보면서 인도의 상황과 비교해 설명한다. 인도가 경제·사회의 발전수준이 우리보다 훨씬 낮지만 정치엘리트들의 정치의식은 우리보다 훨씬 민주화돼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우리가 인도보다 낮은 수준에 맴돌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길교수는 따라서 정치엘리트의 충원방식개선·자질개선과 문민정치확립등이 있어야 내실있는 정치민주화가 가능해진다고 제시했다.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우리 정치의식의 문제점을 대충 간추려 보면 △정치를 너무 승부로만 보는 왜곡된 정치관 △지나친 명분주의에 따른 대화와 타협의 미숙 △준법의식의 결여 △소영웅주의 △권력만능주의등이다.
80년대 들어 우리 정치는 국민지지 획득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는 여야관계로 특징지어지는 일면을 보였다. 2·12 총선까지는 여당이 만만한 야당에 일방적으로 이기는 정치만이 계속되다가 신당돌풍과 함께 개헌투쟁이 시작되고부터는 대소정치의 장이 서로가 내세우는 명분에 따라 어느 쪽도 지지 않겠다는 무한투쟁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집권측은 힘만능주의로, 야당측은 명분투쟁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빚어진 것이 격돌·파행·농성·데모·결렬·위기 따위였음은 누구나 기억하는 일이다. 여야는 작은 전투에서의 양보가 전쟁에서의 승리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에 어느 쪽도 눈뜨지 못했다. 대소전투를 모조리 이겨야만 한다는 의식이 정치를 지배하고 상대방에 대한 조그마한 양보론 (대화·타협론)도 배신·기회주의자·사꾸라로 몰리는 극단적 명분주의가 판을 친 것이다.
그래서 쌍방에 모두 강경파가 득세하고 남보다 앞장서 과격언동을 하는 소영웅주의가「충성」「용기」로 찬양받는 풍토를 보여준 것이다.
정치의 고비마다 협상이 열리지만 번번이 결렬되고 마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양보가 곧 패배로 의식되고 목표가 서면 무슨 수단·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달성해야 한다는「작전식」사고가 우리 정치에 무거운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보니 높아진 국민의식을 정치가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정치와 국민이 유리되는 상황이 지속됐다. 길교수는『가치를 소수가 당점하는 상황이 조성되고 그런 중에 정치인은 권력추구라는 목표만을 향해 뛸뿐 진정한 정치기능은 탈각되는 현상이 됐다』고 설명한다.
지나친 명분론과 타협미숙으로 말미암아 쌍방이 모두 원치 않는, 양쪽 다 손해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지난해 7월 국민적 기대 속에 국회개헌특위가 출범했다가 깨진 과정을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 없다.
여야 어느쪽도 깰 생각이 없었는데도 하찮은 TV중계방식을 둘러싼 이견 때문에 특위는 마비된 것이다. 특위를 운영하고 그것이 TV에 중계되는데 따른 정치적 이득자체를 생중계냐, 녹화중계냐의 미세한 차이 때문에 다 날려 버린 것이다. 전부를 얻지 못하면 전부를 잃는다 해도 도리가 없다는 식이다.
여야간에 박종철군 고문사건의 충격으로 합의한 국회인권특위도 폐회중 3분의1 요구로 소집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결국 설치되지 못했다. 비숫한 예는 수없이 많다. 지엽적인 이견으로 전체를 잃어버리는 이같은 정치행태가 정치의 민주화를 그만큼 후퇴시키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사고 방식과 함께 내편, 네편읕 지나치게 철저히 따지는 것도 우리 정치의 문제점이다. 자기논리와 적의 논리만 있고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는 이른바 흑백논리다.
민주사회의 다양성이 정치에 반영돼야 할텐데 정치논쟁이 흑 아니면 백이라는 일도양단식이 되고보니 토론의 생산적 곁과가 나오기 어렵다. 여야간의 모든 이견이 평행선만 달릴뿐 중간지점에서의 합의를 못보고 만다.
이밖에도 우리 정치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또다른 장애요소로 양철남비같은 조급성을 드는 사람도 많다.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진전되려면 그 속도가 적절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소득수준과 국민의식수준에 알맞는 점진적 개선방안이라야 성공가능성이 높은데도 한꺼번에 모든걸 이루자하는 조급성이 정치인이나 국민 간에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비뚤어진 정치의식은 한마디로「비정상적인 정치상황」에서도 연유한다는 것이 서울대 L교수(정치학·익명요구)의 의견이다. 그는 정치의식이 올바르게 되기 위해서는『올바른 제도가 올바르게 운영돼야 가능하다』고 보고 개선책의 요체를 제도개혁에 두었다.
이와관련, 안병영교수(연세대)는 『우리가 정치 위기를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행태는 과거 20, 30년전보다 많이 성숙된 셈』이라며 『우리의 생활주변부터 권위주의적인 방식은 지양하고 일상생활을 통해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쌓아나가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당정사, 특히 80년대 들어 보인 부정적 정치행태는 이제 새로이 민주화로 가는 이 시점부터 개선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 잘못했는지, 어떤 일은 좋았고, 어떤 행위는 나빴는지 몰라서 개선되지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은 사리·파리·당리에 집착하기 때문이며, 정치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국리민복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민들도 나쁜 정치로 인해 나중에 데모하고 최루탄가스에 고통받기보다 선거에서부터 주권행사를 정당하게 하고 나쁜 정치행태를 견제하는 여론형성에 나서는 시민의식을 보여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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