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칼잡이들이 만든 게 약자 보호하는 기사도 정신…인간 삶엔 그런 모순 많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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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정부와 대기업의 유착 문제에 대해 김우창 교수는 “정부와 기업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불가피하다. 대기업이 망하면 국가 전체가 비틀비틀하게 됐다”면서도 “정부는 대기업을 국가적인 목적에서 돕고, 또 국가적인 목적에서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부와 대기업의 유착 문제에 대해 김우창 교수는 “정부와 기업이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은 불가피하다. 대기업이 망하면 국가 전체가 비틀비틀하게 됐다”면서도 “정부는 대기업을 국가적인 목적에서 돕고, 또 국가적인 목적에서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름 뒤에 ‘논(論)’이 붙는 것은 학자로서 큰 영예다. ‘김우창론’의 주인공인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79·영문학)는 ‘한국 지성계에서 가장 장중한 아우라를 거느린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며 평론계 거목이기도 한 김우창 교수를 만나 시국에 대한 소회를 들었다. 그는 지난 12일 경희대 크라운관에서 ‘지적확신에 대하여: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주제로 강연했다. 경희대와 (재)플라톤아카데미가 공동 주최하는 문명전환강좌 시리즈, ‘세계 지성에게 묻는다-문명전환과 아시아의 미래’의 올해 마지막 강연이었다. 400여 명이 참석한 100분 강연에 이어 이택광 교수(경희대 미래문명원) 사회로 20분간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이번 국정농단 사태의 원인은 무엇이라 보나.
“공직을 맡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일반적인 지혜나 사회 수준이 미흡한 것과도 관련 있다. 권력을 행사하는 공직자는 자신의 이권이 아니라 국가·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리사욕을 버려야 한다. 조선 시대만해도 윤리가 굉장히 강한 시대였지만 지금은 지나치게 권력으로 정권을 이해한다. 공적인 일에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부족하다.”
조선은 윤리 기준이 높았지만 위선적인 사회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덜 위선적인 사회가 된 것 아닌가.
“윤리도 그렇고 뭐든지 그 기원이나 과정까지 포함해 완벽하게 좋은 방책이라는 것은 없다. 기사도가 어떻게 생겼나. 약자와 여성을 존중하는 게 기사도이지만, 기사도는 깡패·칼잡이들이 만들었다. 칼잡이를 하다 보니까 ‘이런 규칙은 지켜야겠다’는 각오가 생긴 것이다. 얼마전 피델 카스트로가 사망한 다음에 미국 기자가 쿠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한 쿠바 작가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결국 자본주의 쪽으로 가는 건데 ‘야만적 자본주의(savage capitalism)’로 가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그 작가가 이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 카스트로 체제도 야만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였을 것이다. 하나의 야만주의에서 또다른 하나의 야만주의로 가는 것이 두렵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완전히 좋은 선택이라는 것은 없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혼란을 겪었기 때문에 사회 공동의 윤리적 기준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할 때는 나쁜 수단을 써도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윤리적 기준을 마련할 수 있나.
“교육과 언론이 잘 해야한다. 이번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참 안됐지만, 국가 권력자가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정치인들이 얻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좀 나아질 것이다. 여러 사건을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의 유산까지 흔들리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인간의 삶이라는 게 비극적이며 모순이 많다’는 인식이 부족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사독재를 거치지 않고 산업화·경제발전을 이룩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독재라는 나쁜 것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나도 사실 잡혀 갔었다. 박 대통령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일도 했지만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다. 너무 급하게 자기의 뜻대로 하다 보니까 문제들이 생겼다. ‘삶에는 모순이 많다’는 인식이 사회에 확산되면 좋겠다. 그러면 ‘박정희 대통령에 나쁜 면도 있지만 좋은 면도 있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상당수 국민·유권자들이 박 대통령이 잘한 것만 혹은 못한 것만 보는 이유는.
“일본에 가면 다른 영주를 죽인 영주가 그 죽은 영주를 위해 쌓은 위령탑이 있다. 비록 자기가 죽였지만 그것이 비참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와 달리 이데올로기가 강하지 않은 일본 같은 사회에는 그런 게 있다. 이념이 강하면 그 나름대로 좋은 점이 있다. 국가의 지침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들어있는 모순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게 힘들어진다.”
우리나라가 이념이 약한 나라였다면 박 대통령의 업적과 유산을 누구나 그리워했을 거란 얘긴가.
“업적이 있어도 박 대통령의 유산은 극복해야 하는 유산이다. 군사독재를 통해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경제발전 한 것은 문제가 있다. 동시에 우리는 그의 업적에 의지해 살고 있다는 모순이 있다. 앞으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극복해야 한다.”
‘박정희 패러다임’의 극복을 말하는 시대다. 어떻게 가능할까.
“좋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나쁜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는 데 길이 있다. 사실 공산주의 같은 것도 그렇지 않은가. 모두 다 평등하게 잘 살자고 했지만 그 수단이라는 것이 너무나 잔인무도 했다. 또한 ‘좋은 목적’은 많은 경우 사익을 위해 활용될 수도 있다. 사실 명분 없는 나쁜 일이라는 게 별로 없다. 그런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나라 내부의 지역주의에는 실체라든가 필요성·정당성이 있는가.
“우리가 소속된, 또 사람을 규정하는 큰 테두리에는 가정도 있고 친구도 있고 지역·나라·인간·생명체도 있다. 이것들과 우리는 다층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예컨대 전라도 사람이 전라도의 안녕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국가·인간·생명체·환경과도 균형을 잡아야 한다. 갈등이 없을 수는 없지만 갈등을 다층적인 조화속에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게 지도자들이 해야할 일이다.”
‘충청도만 정권을 못잡아 봤다’는 아쉬움에서 ‘충청도 대망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느 정도 명분이 있나.
“그건 순전히 싸우자는 말이다. 서로 나눠 먹고 싸우고 이러자는 것은 국가 전체의 윤리적인 기준이 없다는 이야기다. 충청도 사람의 안녕도 도와주고 국가도 전체 이익도 돌봐야 한다. 또 그 위에 인간 보편주의가 있어야 한다. 다층적이지 못한 지역주의는 좋은 것을 끼리끼리 나누고 서로 빼앗겠다는 생각이기 때문에 정말 없어져야 되는 야만이다.”

글=김환영 기자 whanyung@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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