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테크 허브, 런던서 베를린·더블린으로 무게중심 이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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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21면

[Shutter Stock]

지난달 23일 유럽 역사에 기록될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브렉시트(Brexit)’다. 1993년 유럽연합(EU)이 설립된 이래 최초로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세계 금융시장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미쳤다. 브렉시트로 금융 뿐 아니라 정보기술(IT) 산업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다. 브렉시트로 인해 눈물 짓는 곳이 있는 반면, 새로운 기회를 잡은 도시들이 있다.


먼저 브렉시트로 영국 IT 산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자. IT 업계에서는 글로벌 경쟁력 약화의 이유로 브렉시트를 강하게 반대했다. 영국 테크UK는 277개 영국 IT 회사 대상으로 브렉시트 찬반에 대한 여론 조사를 했다. 응답기업 중 약 70%가 브렉시트를 반대했고 나머지 30%는 브렉시트 찬성 및 모름으로 답했다. 반대 사유를 살펴보면, 글로벌 투자 매력도 하락 및 기술 경쟁력 약화를 주로 거론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 EU로 이동 예상영국은 유럽과 미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같은 언어와 문화를 가지기 때문에 미국시장 진출에 용이하다. 그래서 영국 IT 기업들은 다른 유럽권 국가들의 IT 기업에 비해 쉽게 미국과 영국을 오가면서 해외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는 투자자들이 영국 IT 기업들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됐다. 영국의 규제를 충족하면 자동적으로 유럽의 규제도 충족되는 이점도 있다. 그래서 미국 글로벌 기업들은 영국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는 경우가 많다. 영국 기업들, 특히 IT 분야의 스타트업 기업들은 미국의 대형업체와의 제휴를 통해 미국과 유럽이라는 거대한 두 시장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렉시트는 이러한 이점들을 모두 사라지게 한다. 영국 기업의 미국 시장 진출이 용이하다는 것은 변함없지만 EU 회원국으로 얻는 이점이 사라지게 된다. 미국 IT 기업들은 유럽시장 진출을 위해 영국이 아닌 다른 국가 IT 기업들과 제휴방안을 모색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IT 기업들의 인력 공급에도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서는 학생들이 수학·공학을 전공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이 최근 들어 발생하고 있다. 그 결과 IT 개발인력 부족 현상이 발생될 것으로 전망되는데, 브렉시트는 이를 더욱더 가속화 할 것으로 보인다.


영국에 들어온 유럽 이민자들은 200만명이 넘는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고급 인력이 소프트웨어 개발 및 공학 연구 분야에서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고 있다. 그러나 브렉시트는 유럽과 영국 사이의 노동 움직임에 제약을 가한다. 이런 인재들이 영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면 영국 IT 기업들은 인력 부족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 영국 내 유럽 이민자들의 국적은 118개국에, 사용하는 언어만 21개다. 이런 다양한 국적의 인재를 채용해 유럽 각 국의 상황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도 브렉시트로 인해 예전보다 희석될 전망이다.


인력유출 현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오피스브로커닷컴이 18~34세 영국인을 대상으로 브렉시트 발생시 이민갈 생각이 있는지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5%가 “이민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CEO)인 크리스 메레디는 “영국에 있는 기업들이 조만간 심각한 인력난을 겪게 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미국 기업들, 유럽 ‘세이프 하버’ 잃는 셈영국 IT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는 당연히 IT 산업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는 브렉시트 이전에는 올해 영국 IT 산업이 1.7%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브렉시트 이후 기존 예측보다 성장률이 2~5%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하향 조정했다. 올해부터 영국 IT 산업이 마이너스 성장에 들어간다는 의미다. 아직 다른 유럽 국가로 이전한 IT 기업은 없다. 하지만 브렉시트가 현실화되는 시점에서는 영국에 유럽 본사를 둔 IT 기업들이 다른 유럽 국가로 이전하는 일이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영국에 위치한 IT 스타트업 기업들이 대거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스타트업에 있어서 시장활동 범위와 인력 모집은 중요한 요인이다. EU 시장 접근성이 높고 유능한 인력을 쉽게 모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고려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금 조달도 큰 문제다. EU는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의 일환으로 벤처투자 기금을 운용하고 있는데, 규모가 유럽 전체 벤처투자 기금의 41%에 달한다.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면 이런 투자기금의 헤택을 받지 못하게 된다. 유럽의 금융 중심이라는 런던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도 스타트업 설립을 고려하는 청년 창업자들이 더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영국을 제외하고 브렉시트로 가장 크게 피해를 입는 기업들은 바로 미국 IT 기업들이다. 특히나 브렉시트로 미국 IT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고있는 것은 바로 ‘안전 항구(세이프 하버)’ 논란이다. 세이프 하버란 2000년 미국과 EU가 맺은 정보 공유 협약이다. 이 협약으로 구글·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MS)와 같은 미국 IT 기업들이 영국 지사를 통해 EU 이용자들의 웹 검색 이력이나 소셜 미디어 업데이트 상황 같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EU를 탈퇴해버리면 세이프 하버가 적용되지 않아서, 미국 IT 기업들의 유럽 시장 활동에 큰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브렉시트 투표 직전까지 미국 IT 기업들이 브렉시트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MS는 “브렉시트 당사자들에게 다양한 이유가 있다는 점은 이해하는 바지만 비즈니스 측면에선 영국이 EU에 잔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공개 서한을 발표한 적도 있다.


영국-EU 핀테크 상호인증도 폐기 전망세이프 하버 말고도 미국 IT 기업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세금 문제다. 글로벌 기업들은 법인세율이 낮은 아일랜드에 미국 법인용과 해외 법인용의 자회사 두 개를, 지적재산권 사용료에 대한 세율이 낮은 네덜란드에 이 두 회사를 연결하는 페이퍼 컴퍼니를 세운다. 유럽 등지에서 번 수익은 아일랜드와 네덜란드를 거치며 낮은 세금을 납부하고 다시 아일랜드를 거쳐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 세금 회피처로 최종 송금된다. 1980년대 애플이 개발한 ‘더블 아이리시 더치 샌드위치’ 기법으로 아마존·애플·구글 등 미국 IT 기업들이 널리 활용한다. 하지만 올 1월 구글은 영국에 1억3000만파운드(약 2000억원)의 세금을 물리는 등 유럽 각국은 IT 기업에 대한 조세를 강화하고 있다. 여기에 영국이 EU를 탈퇴해 자유로운 자본 거래가 막히면 미국 IT 기업들이 영국에 유럽본부를 운영할 메리트가 더 줄어들게 된다.


브렉시트로 모든 도시들이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다. 독일 베를린과 아일랜드 더블린은 대표적인 수혜 도시로 꼽힌다. 이 두 도시는 핀테크(금융 IT 기술) 클러스터 조성을 위해 규제 완화 및 세금 혜택을 주고 있다. 지금까지 런던에 위치한 레벨39가 유럽 및 글로벌 핀테크를 강력하게 이끌어 왔다. 레벨39는 런던 금융 중심지인 카나리와프에 위치한 원캐나다스퀘어 빌딩의 핀테크 클러스터를 의미한다. 현재 이 분야의 100개 가까운 스타트업들이 입주해 있다.


영국 금융감독청은 핀테크 스타트업들이 자국 내 금융 서비스업 라이선스를 취득하면 EU 회원국 내에서도 핀테크 비즈니스를 할 수 있도록 상호운영인증제도를 시행해 왔다. 그러나 브렉시트가 시행되면 상호운영인증제도는 자동으로 폐기된다. 그렇게 되면 영국 내 핀테크 스타트업들은 EU 각국과 별도로 라이센스를 체결해야 한다.


런던의 위기는 베를린과 더블린에는 강력한 기회가 된다. 더블린의 경우 핀테크 분야 기업들에 부과하는 법인세가 12% 이하 수준이며, 마스터카드·페이팔·퍼스트데이터 등 글로벌 핀테크 기업들이 이미 포진해 있다. 베를린은 새로 떠오르는 하이테크 도시로서 글로벌 인재들이 포진해 있는데다 핀테크 산업 육성에 전력을 쏟고 있다. 이미 유럽에서는 베를린을 ‘제2의 레벨39’ 후보로 거론되고 있을 정도다.


실질적으로 브렉시트는 2018년 이후에나 현실화된다. 그 과정에서 세계 경제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정도 확실한 것은 브렉시트로 인해 영국 IT 산업은 큰 손실을 볼 것이라는 점이다.


유성민?IT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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