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信 타고 달리는 부산행 KTX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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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29면

한국 영화에서 좀비는 오랫동안 금기어에 가까웠다. 한국 최초의 좀비 영화 ‘괴시’(1980)를 비롯 ‘이웃집 좀비’(2009) ‘좀비스쿨’(2014) 등 의미 있는 시도가 있긴 했지만 흥행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여러 요소들이 작용했다. 서아프리카 지역 부두교에서 뱀처럼 생긴 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거나 콩고어로 신을 뜻하는 ‘nzambi’에서 나왔다는 유래는 지정학적으로 너무 멀었다. 우리에게는 소복을 뒤집어 쓰고 나온 처녀귀신이 한층 더 친숙하고 무서웠던 탓도 있다. 반쯤 죽었다가 살아난 좀비가 흐느적 거리며 걸어다니는 모습 역시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을 터다.

그런데 20일 개봉을 앞둔 영화 ‘부산행’은 제법 용기있는 선택을 했다. 모두가 꺼리는 좀비를 전면에 앞세우고, 7명이나 되는 주요 등장 인물에 공유ㆍ정유미ㆍ마동석 등 메이저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메가폰을 잡은 사람은 애니메이션을 주로 만들어온 연상호 감독이다.


시도는 성공한 듯 보인다. 미드나잇 부문에 초청된 칸 영화제에 이어 언론 시사회 반응도 매우 호의적이다.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캐릭터를 덧입은 연기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 서울역에서 출발한 부산행 KTX 안에서 좀비가 번져나간다는 색다른 설정 덕분에 얻어낸 뛰어난 속도감, 그리고 박재인 안무가가 빚어낸 좀비들의 움직임은 남다른 임팩트를 선사한다.


놀라운 것은 영화에 좀비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좀비가 시퍼런 핏줄을 드러내고 온 마디마다 관절을 꺾고 희멀건 한 눈동자를 까뒤집는다 해도, 그들은 마주치지만 않으면 되는 존재다. 내가 이미 감염된 이에게 물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눈에 띄지만 않는다면, 나를 해칠 리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나와 같은 시공간에서 생활하고 함께 밥을 먹고 웃고 떠들던 사람이 불신을 품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신체적 접촉에 의한 직접 감염이 되지 않더라도 말과 말을 타고 가는 간접 감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순간에 모든 사고 기능을 정지시킬 만큼 매서운 힘도 가지고 있다.


‘부산행’은 불신을 타고 증폭한다는 점에서 영화 ‘곡성’과 닮았다. ‘곡성’은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절대 현혹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의심하기에 합당한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그 미끼를 덜컥 무는 순간 그 이후의 일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고 불신은 곧 지옥임을 보여준다.


반면 ‘부산행’은 도처에서 피어나는 불신을 상대로 정면돌파한다. 가족을 향한 나의 사랑이, 친구를 향한 나의 우정이 옳았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바로 그 점이 할리우드 좀비 영화와의 차별점이기도 하다. ‘월드워 Z’(2013)의 가족애나 ‘웜바디스’(2013)의 사랑 이야기가 아닌, 신념과 믿음을 따르는 멀티 서사가 작동되니 말이다.


어찌 보면 익숙지 않은 소재를 다룬 두 영화가 많은 관객들에게 소구하는 것 역시 같은 지점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미 불신으로 가득하기에 그것을 가중시키는 존재의 정체가 좀비인지, 귀신인지, 인간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다. 나라가 국민을 버린 재난상황에서,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세상에서 더 큰 비극을 맞지 않기 위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답안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도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라는 외침이 아픈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영화 속 석우(공유)가 딸 수안(김수안)에게 “이럴 때는 양보하는 거 아니야”라고 세월호 사태를 빗대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제 믿을 만한 것이 필요하다.


글 민경원 기자, 사진 NEWㆍ이십세기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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