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민영화|자율경영 보장돼야 성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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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글자 그대로의 민영화라기보다는 단순한 정부소유주식의 매각에 가깝지만 그래도「첫 술밥」으로서는 꽤 배부르다 할 수 있는 것이 17일 확정된 정부의 공기업민영화 일정이다.

<민영화의 첫걸음>
공기업의 민영화가 구체적으로 거론된 지난해 하반기 이후 3차례의 민영화 추진위원회가 열렸을 뿐인데, 이번에 3개 국책은행과 포철·한전 등 굵직한 공기업들의 개략적인 민영화일정·방법이 잡혔으니 상당한「드라이브」라 할만하다.
그러나 그 내용을 뜯어보면 아직도 실질적인 민영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극히 초보적인 민영화이며, 몇몇 기관은 아예 그 같은 초보적인 단계로의 진입에조차 상당한 진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이번에 확정된 민영화 일정 중 가장 뜻이 있다할 국민은·외환은·기업은 3개 국책은행의 민영화를 보자.
우리의 경제체질이나 금융관행상 정부로서 가장 내놓기 힘든 것이 바로「자금배분의 기능」인만큼 3개 국책은행의 소유를 완전히 민간에 넘기기로 한 것은 일단 평가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외환은은 이미 하고있는 일이 일반 시은과 다를 바 없고 국민은과 기업은은 앞으로도 계속 당초의 설립목적인 서민금융과 중소기업금융을 담당토록 되어있다. 따라서 이번 3개 국책은행의 주식매각이 실질적인 금융의 민영화를 뜻하는 자율경영과 정책금융의 축소에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3개 국책은행의 소유주가「공개」의 방법을 통해 널리 분산되면 소액주주나 이사회의 기능이 실세권한을 부여받지 못하는 한 경영의 안정을 위해 관의 입김은 더욱 거세질 소지도 있다.
또 한전·포철 등도 앞으로 상당기간 정부가 51%의 지분을 확보한 채 나머지를 단계적으로 팔아 넘기겠다는 것이니 역시 경영권의 이양이 아닌 소유지분의 부분적인 민간매각단계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은행이나 한전·포철 등의 경영권을 민간 대주주에게 완전히 넘긴다는 것은 금융구조·대기업의 경제력 집중·기간산업의 중요성 등 우리의 현실을 감안할 때 불가능한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 정부주식의 매각은 완전한 민영화로 가는 첫걸음을 떼었다는 것만으로도 뜻이 있다 할 것이다.
이에 비하면 증권거래소나 한국기술개발은 그 비중도 적을 뿐더러 25개 증권사나 기존주주들이 정부지분을 나눠 갖는데 별무리가 없으므로 첫 단계에서부터 완전한 소유·경영상의 민영화가 손쉽게 이루어지는 케이스다.

<실질경쟁 숙제로>
한국감정원은 일단 정부주식이 기존주주인 시은에 완전히 넘어가지만, 현행 감정 및 평가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감정법인의 설립제한을 완화하는 등 감정업계의 실질적인 경쟁체제를 갖추어야한다는 숙제가 남아있다.
반면 체신부산하의 통신공사나 문교부산하의 국정교과서가 각 소관부처의 강력한 이의에 의해 소유주식의 부문적인 매각조차 늦춰지고 있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교과서개편과 교육개혁 일정상 국정교과서를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이 문교부의 주장이지만 금융산업개편이 걸려있는 재무부가 3개 국책은행을 완전히 공개키로 한 것과 견주면 아무래도 문교부의 머리가 굳어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통신공사도 역시 한전이나 포철의 경우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경직되고 낡은 사고방식의 울타리 속에 갇혀있는 기관이라는 얘기를 들을 만 하다.

<나라살림에 보탬>
민영화를 늦추는 확실한 명분이 있다기보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측면이 더 강한 것이다.
어쨌든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될 공기업의 민영화가 당장 가시적으로 몰고 올 큰 변화는 증시에 막대한 물량의 신주가 공급된다는 것과 쪼들리는 나라살림에 상당한 보탬이 되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마땅히 주식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도록 기관별 주식매각일정을 신중히 조정하고 더욱 알뜰한 나라살림을 꾸려 가는데 신경을 써야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경제 전체의 효율을 높인다는 민영화의 근본취지를 꾸준히 살려 가는 일이다.
정부 각 부처나 각 공기업의 그 같은 노력이 없는 한 이번에 확정된 민영화일정은 단순한 정부의「주식장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김수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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