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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수상한 그녀'의 변신은 무죄, 현지 적응 완료! 한·중·일·베트남판, 각 나라별 관객 공략법

중앙일보

입력

분명히 같은 이야기인데 조금씩 다르다. 영화 ‘수상한 그녀’(2014, 황동혁 감독) 말이다. 이미 중국·일본·베트남 등에서 현지 감독의 지휘 아래 현지 언어로 만들어져, ‘꽃할매’ 열풍을 일으킨 이 영화가 아시아를 넘어 태평양을 건넜다. CJ E&M은 ‘수상한 그녀’가 영어와 스페인어로도 만들어진다고 지난달 공식 발표했다. CJ E&M이 각국의 영화 제작사와 공동 제작 방식으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거쳐 내놓은 덕에 거둔 성과다. 국내에서 관객 865만 명을 모으며 크게 흥행했지만, 이렇게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줄 누가 알았을까. 이 영화를 만든 황동혁 감독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다.
지난 11월 19일, 이 영화를 만들고 리메이크한 한·중·일 감독이 모인 자리를 찾았다. ‘유쾌한 한·중·일 무비토크-영화 ‘수상한 그녀’로 보는 한·중·일의 공통성과 다양성’ 좌담회였다. 여기서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 나라에서 어떻게 이 영화를 ‘현지화’했는지 샅샅이 살펴봤다. 세계화를 꿈꾸는 콘텐트를 마음에 품은 이라면 반드시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다.

가족애와 심은경의 힘 한국판 ‘수상한 그녀’

욕쟁이 할머니 말순(나문희)은 자나 깨나 아들 현철(성동일) 생각뿐이다.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입만 열면 아들 자랑. 하지만 식구들이 자신을 요양원에 보내려 하자 상심에 빠진다. 터덜터덜 밤거리를 걷다 우연히 들어간 사진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스무 살로 돌아간 말순은, 평소 동경하던 배우 오드리 헵번의 이름을 따 ‘오두리’(심은경)라는 이름으로 가수의 꿈에 도전한다.

한국 원작은 몸이 바뀌는 ‘보디 체인지 판타지’에서 나오는 코미디와 가족애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에, 주연 배우 심은경의 맛깔 나는 연기가 보태져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황동혁 감독은 내년 개봉을 앞둔 영화 ‘남한산성’ 준비에 여념이 없음에도, ‘수상한 그녀’에 대한 애정으로 좌담회를 찾았다. 그는 “시골에 사는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수상한 그녀’가 이렇게 전 세계로 뻗어 갈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웃었다.

원작의 중요한 정서는, ‘말순이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온갖 고생을 하며 아들을 키워 냈다’는 설정에서 비롯된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판과 베트남판에서도 이러한 설정이 반복된다는 것. 과거 혹독한 전쟁을 치룬 나라에서 공통으로 교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한국·중국·베트남과 달리 자국 내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난 전쟁이 없었기 때문일까. 전후 가난했던 시절을 겪은 주인공 모습이 플래시백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전쟁으로 갖은 수난을 겪고 남편을 잃은 여자’라는 설정은 빠졌다.

이날 좌담회에 깜짝 등장한 배우 심은경은 “20대인 내가 할머니 감성을 소화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고민 끝에 황 감독님과 평소에도 사투리로 대화하곤 했다”며 “그럼에도 여배우라면 누구나 욕심낼 만한 캐릭터이기에, 다른 나라 배우들도 용기 내 도전하지 않았을까”라고 소감을 전했다.


황동혁 감독의 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어머니와 함께 살았기에 말순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극 중 그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탕을 주는 모습, 틀니를 빼 컵에 넣어 두는 모습 등은 모두 우리 할머니에게서 따온 것이다. 처음엔 몰랐는데, 이 영화를 만들며 점차 ‘이 이야기가 가족애가 강한 아시아에서 통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주인공이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 날 보게 되는 배우 사진을 한국 배우 김지미에서 오드리 헵번으로 바꾼 것도, ‘전 세계에서 통할 만한 설정이 뭘까’ 고민한 끝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 영화가 8개국 언어로 제작될 줄이야(웃음).”

원작과 유독 닮은 중국판 ‘20세여 다시 한 번’

‘20세여 다시 한 번’의 오프닝 시퀀스. “늙지 않을 수 있나요?”라는 교수의 질문에 대한 학생들 대답이 가관이다. “한국 가서 필러 맞으면 돼요!” 원작과 거의 동시에 제작되기 시작한 중국판 ‘수상한 그녀’에는 원작의 대형 포스터가 버스 정류장에 걸려 있는 등, ‘한국’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인 장면이 많다. 손자만 편애하는 할머니 모습과 고부 갈등 또한 원작과 똑 닮았다.

하지만 주인공이 마작을 즐기는 등 ‘중국판’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도 많다. 주인공이 젊은 모습으로 바뀌는 사진관은, 곧 마법이 일어날 듯 황홀한 분위기로 연출됐다. 이에 대해 첸 감독은 “중국 사람들은 사진관에서 판타지적인, 즉 과장된 사진을 많이 찍는다. 그런 점을 반영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주인공이 부르는 노래가 중국 ‘국민 가수’ 등려군(덩리쥔)의 노래라는 점이다. 그의 이름을 딴 리쥔(양자산)이 “너 군대 갔다 왔어?”라며 젊은이들을 심하게 꾸짖는 장면 또한 명백히 ‘중국색’이 가미된 대목이다. 리쥔의 손자(루한)가 노래하는 장면이 원작이나 다른 나라 작품에 비해 유독 많은 것도 주목할 점. 아이돌 그룹 엑소(EXO)의 전 멤버 루한이 손자 역을 연기했기 때문인데, 이 영화를 통해 그가 중국에서 누리는 인기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한국영화 ‘블라인드’(2011, 안상훈 감독)를 리메이크한 ‘나는 증인이다’(9월 14일 개봉, 안상훈 감독)에서도 루한을 주인공으로 발탁하는 전략을 쓴 바 있다. ‘20세여 다시 한 번’은 중국에서 지난해 1월 개봉해 관객 1200만 명을 그러모았다. 한·중 합작 영화 중 최고 흥행 기록이다.

레스티 첸 감독의 말
“내 어머니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 유일한 작품일 정도로 어디에서나 통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중국은 무척 넓고, 지역마다 문화가 다르다. 그럼에도 분명 공감을 일으킬 이야기일 것이라 믿었다. ‘1가구 1자녀’ 정책 때문에 원작에서처럼 남매를 등장시킬 수 없었는데, 고심 끝에 쌍둥이로 설정했다. 이처럼 중국의 사정을 고려한 설정이 꽤 있다.”

모녀 관계와 로맨스가 중심 일본판 ‘수상한 그녀’

일본판은 오프닝부터 원작과 다르다. 주인공 할머니(바이쇼 미츠코)가 목욕탕에서 일한다는 점에서다. 스무 살로 돌아간 그가 숙식을 해결하는 곳 또한 목욕탕. 목욕 문화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일본인의 일상을 녹여 각색한 설정이다. 모자(母子) 관계를 그린 원작·기타 작품들과 가장 다른 점은 딸(고바야시 사토미)과 엄마(바이쇼 미츠코·타베 미카코)의 관계를 그렸다는 점이다.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딸이 잡지 편집장 자리에서 밀려나 수모를 겪는 장면도, 일본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는 스타 타베 미카코와 카나메 준이 주연이기 때문일까. 일본판은 무엇보다 로맨스에 방점을 찍었다. 역시 오드리 헵번에서 이름을 따온 ‘오도리’(타베 미카코)가 프로듀서(카나메 준)와 함께 강가에서 캠핑을 즐기는 등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장면이 대폭 늘어났다. 이 영화는 ‘사죄의 왕’(2013) 등 코미디로 유명한 미즈타 노부오 감독이 연출해, 지난 4월 일본에서 개봉했다.


미즈타 노부오 감독의 말
“열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나와 남동생을 홀로 키우셨다. 재혼하지 않고 자식에 헌신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늘 죄책감이 들었는데, 원작을 보고 마치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피를 나눈 부모 자식 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情), ‘인생을 다시 스무 살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판타지 등 누구나 공감할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일본의 현실을 반영해 싱글맘을 등장시켰고, 관객 대부분이 여성이기에 모녀(母女) 관계로 설정을 바꿨다. 그것이 더욱 감동을 줄 것이라 봤다. 또 일본 관객은 굉장히 꼼꼼하고 세밀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느낄 만한 부분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판타지적 설정을 부각하는 데 크게 힘주진 않았다.”

디테일하게 그려 낸 일상 풍경 베트남판 ‘내가 니 할매다’

베트남판의 가장 큰 특징은 유독 슬랩스틱이 많다는 것. 코를 판다거나 바지가 흘러내린다거나 하는, TV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꽤 많다.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만들어진 작품들과 비교해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베트남 사람들의 일상을 무척 꼼꼼히 화면에 담아낸 부분이다. 등장인물들이 주로 오토바이를 이용하고, 스무 살로 돌아간 주인공(미우레)이 즐겨 찾는 장소가 길거리에 낮은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를 둔 노점이며, TV에 사이공 맥주 광고가 등장하는 점이 그 예다. 실제 베트남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주인공이 집에서 몰래 신용카드가 아닌 현금을 챙겨 나온다거나, 길거리 공연이 금지된 베트남에서 버스킹하던 밴드가 경찰에 쫓기는 장면 또한 깨알같이 살린 디테일이다.

애국의 의미를 강조한 장면은 중국판과 비슷하다. 주인공이 수영장에서 시비가 붙은 껄렁껄렁한 젊은이들에게 “너희는 나라를 지켜 본 적 있느냐. 지금 신나게 놀 수 있는 것도 어른들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라 말하며 혼내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비평가 출신의 신인 감독 판씨네가 만든 이 영화는 485만 달러의 매출을 거뒀다. 역대 베트남 영화 중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고, 주연 배우 미우레는 스타로 거듭났다.

판씨네 감독의 말

“로맨스보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싶었다. 우리 어머니는 삼남매를 홀로 키우다시피 했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베트남전에서 전사하며 서른 살에 홀로 되셨다. 극 중 주인공이 동경하는 대상은 베트남의 전설적 여배우 탄응아인데, 이 영화에는 그의 친아들이 출연하기도 했다. 베트남의 흘러간 국민 가요를 리메이크해 영화에 삽입하기도 했다.”

아시아 넘어 태평양 건넌 ‘수상한 그녀’


지난 11월 24일 ‘수상한 그녀’는 ‘다시 또 스물’(아라야 수리한 감독)이란 제목으로 태국에서도 개봉했다. 첫 한·태 합작 영화로, 제작 방식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진행된 것과 비슷했다. CJ E&M이 태국 1위 극장 사업자 ‘메이저 시네플렉스 그룹’과 만든 합작 법인 ‘CJ 메이저 엔터테인먼트’에서 내놓은 것이다. 철저한 현지화 과정을 거쳐 특히 코미디에 힘을 줬으며, ‘태국의 전지현’이라 불리는 다비카 후네가 주연을 맡았다. 태국뿐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내년 상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역시 현지 감독이 연출하고 인도네시아 배우가 등장한다.

더욱 기대되는 것은 이 영화의 리메이크가 서구권으로도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CJ E&M은 지난달 “미국 제작사 ‘타일러 페리 스튜디오 34th 스트리트 필름’ ‘3pas 스튜디오’와 각각 손잡고 영어 버전과 스페인어 버전을 공동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2018년 개봉을 목표로 역시 철저한 현지화 과정을 거칠 계획이다. 이렇게 ‘수상한 그녀’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베트남어·태국어·인도네시아·영어·스페인어 등 총 8개 언어로 제작되는 세계 최초의 영화’라는 진기록을 세우게 됐다. 특히 코미디 배우이자 감독인 유지니오 델베즈가 이끄는 제작사 ‘3pas 스튜디오’가 제작하는 스페인어 버전에 대한 기대가 높다. 미국 내 히스패닉 사회뿐 아니라 멕시코 등 스페인어권 중남미 시장에도 소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CJ E&M 영화사업부문 정태성 대표는 “‘한국 스토리의 매력에 각국의 문화를 녹여 그곳의 인기 배우를 출연시켜 영화를 만들면,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라며 “규모가 작은 국내 시장을 넘어 전략적 세계화가 필요한 때에, 제대로 성공한 사례라 매우 뜻깊다”고 말했다. 또 “터키·스페인·독일·인도까지 뻗어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덧붙였다. 터키어와 독일어로도 만들어지면, 이 영화는 10개국 언어로 만들어지는 셈이다.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사진=CJ E&M, 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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