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장례식 아르바이트까지 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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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홍콩의 상가(喪家)에 요즘 '대학생 부대'가 떴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르바이트를 찾지 못한 대학생들이 관(棺)을 운반하거나 장례식을 돕는 '상사(喪事) 도우미'로 나선 것이다.

장례용품을 든 대학생 10여명이 홍콩 주룽(九龍)반도 북서쪽의 한 빌딩 안에 있는 양로원에 들어가려다 주민들의 제지로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관을 앞세워 북.피리를 울리고, 울긋불긋한 장례 인형.깃발을 들고 가면서 생긴 충돌이었다. 현지 언론들은 "장례업체가 부르면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까지 4백 홍콩달러(약 6만원)의 일당을 받고 출동한다"고 전했다.

과거 IMF 시절 한국에서 일부 대학생들이 영안실에서 아르바이트로 시체를 닦던 것과 닮은 꼴이다.

홍콩 경제가 몇년째 죽을 쑤다 보니 젊은층의 고통은 기성 세대 못지 않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최저생활에 미치지 못해 정부의 생계 보조금을 받는 숫자가 7백56명이나 된다. 최근 9개월간 36%(2백73명)가 늘었다고 한다.

인구 6백80만명인 홍콩에선 요즘 젊은층의 실업 문제가 골칫거리다. 15~24세의 연령층 가운데 학교를 다니지도, 직장을 갖지도 않는 인구가 10만명을 넘었다는 통계가 나온다.

한창 뻗어나가야 할 나이에 좌절부터 맛보는 셈이다.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선 이들을 돕기 위해 인턴 직원을 뽑고 창업 센터를 만드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하지만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말처럼 사태는 영 나아지지 않고 있다.

젊은층의 불만은 이제 한계를 넘고 있다. 지난 7월 있었던 세차례의 반정부 시위에선 중산층과 함께 20대들이 주력 부대를 이뤘다. 이들 중에선 "돈을 벌기 위해 도박이나 범죄를 할 수 있다"는 도덕 붕괴 심리마저 엿보인다.

공교롭게도 30여개의 민간단체들은 지난 3일 '둥젠화(董建華)내각 타도'를 단일 구호로 연합전선을 만들었다. 董내각에 대한 민심이반을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의 정치판에선 "경제를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는 게 상식이다. 1인당 소득이 2만달러를 넘는 홍콩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이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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