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다" 버티자 물고문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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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두손이 뒤로 묶인채 박종철군은 4명의 경찰관에 의해 양팔과 발이 들려 욕조물에 머리가 처박혀 숨져갔다.
발버둥도 소용없고 신음조차 낼수없는 물고문. 너비 6cm 욕조턱에 걸린 목의 대정맥이 건강한 육신의 무게와 머리를 짓누르는 힘에 졸려 뚝 흐름을 멈춘 잠시후 박군은 숨을 거두었다.
서울대생 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 발생 1백30일. 마침내 현장인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조사실에서 고문경찰관들이 물고문을 재연하는 현장검증이 실시됐다. 2명의 취재기자만 참관, 취재가 허용됐을뿐 사진촬영도 금지되고 범행의 주요부분만을 실연하는 현장검증이었으나 그런대로 박군고문치사의 진상은 한꺼풀 베일을 벗었다. 그러나 물고문 이외의 가혹행위, 특히 전기고문이 있었는지, 박군 사체에서 발견된 피멍(15개)과 오른손 엄지와 검지사이의 멍이 어떤 고문에 의해 생겨났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현장검증을 중심으로 재구성해본 박군고문치사의 상황.
◇연행=14일 상오8시5분쯤 박군은 조한경경위·황정웅경위·반금곤경장·이정호경장등 4명의 대공수사단 수사관들에게 연행돼 서울남영동 치안본부대공분실에도착했다.
승용차에서 내리자 박군은 양팔을 수사관들에게 잡힌채 원형화단을 지나 현관에 들어서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8호조사실에 끌려들어갔다.
조사실은 3.5평 크기. 출입문 안쪽 왼편으로 책상과 의자가 마주놓였다.
의자와 책상은 모두 붙박이. 오른편 벽쪽으로 회백색시트가 씌워진 침대.
등쪽 벽에는 작은 창문이 있었고 그 앞으로 70cm높이 칸막이가 있었다. 바로 그 너머 안쪽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마의 욕조가 있는 줄을 박군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4명의 경찰관중 조경위등. 3명은 곧 조사실을 나가고 반경장만 혼자 남았다. 둥근 얼굴에 다부진 인상의 반경장은 박군을 의자에 앉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책상맞은편 의자에 앉아 말없이 박군을 쏘아보기만하며 감시했다.
30여분쯤 지난 8시50분쯤 이경장이 들어와 반경장과 임무교대.
◇조사준비=9시20분쯤 이경장은 박군에게 아침식사를 하겠느냐고 물었다. 전날 친구와 술을 마시고 늦게 잠이 들었다가 잠결에 연행된 박군은 『밥맛이 없다. 물이나 달라』고 부탁했다. 이경장은 칸막이뒤로 가더니 냉수를 한컵 받아다 주었다.
박군은 연거푸 석잔의 물을 마셨다. 이경장은 물을 마시고난 박군에게 친구·서클관계등에 대해 몇마디 물었지만 건성의 질문. 잠시후 콩나물국 백반인 아침식사가 배달됐다. 박군은 몇숟갈 뜨는 시늉만했다.
9시30분쯤인 이시각 같은층 14호조사실에는 박군과 같은 집에서 하숙하는 하종문군(24· 서울대대학원 인류학과2)이 연행돼 조사를 받고 있었다. 조경위가 먼저 간단한 신상관계및 서클관계등을 물었고 반경장은 하군에게 자술서쓰는 형식등을 일러준뒤 조사를 시작했다. 반경장이 조사를 벌이는동안 당뇨병으로 몸이 불편한 황경위는 조사실 침대에 드러누워 휴식.
◇조사=식사를 마친뒤 박군은 이경장의 지시에 따라 자술서를 쓰기 시작했다. 10시30분쯤 강진규경사가 들어왔다. 막 조사를 시작하려할때 다른 수사관인듯한 몇사람이 들어와 자신들이 8호실을 쓰기로했으니 방을 비워달라고 요구했다. 강경사와 이경장은 박군을 데리고 바로 옆방인 9호실로 갔다. 9시50분쯤.
9호실도 8호실과 같은 구조. 옮긴직후 14호실에서 하군을 신문하던 조경위가 다시 9호실로 왔다. 조경위는 다짜고까 서울대민추위사건의 수배자인 박종운군 소재를 대라고 박군을 을러댔다. 이경장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고 강경사는 박군 주위를 서성이며 지켰다.
◇고문=계속되는 추궁에도 박군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자 조경위는 박군에게 의자에서 내려와 침대옆 바닥에 무릎을 굻게했다. 조경위는 의자에 앉은채 쳐다보고 강경사가 박군주위를 서성이며 박종운군의 소재를 말하라고 다그쳤다.
박군이 계속 버티자 조경위는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는데』하고는 이경장에게 『욕조에 물을 채우라』고 지시했다. 욕조에 물이 찼다. 조경위는 박군을 욕조앞에 데려갔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으라고 지시했다. 높이57cm, 폭74cm에 길이1m23cm의 인조대리석으로된 욕조는 무릎을 꿇어 세우면 머리부분이 물에 잠길 정도.
주저하던 박군은 이들의 험악한 기세에 눌려 손을 욕조턱에 짚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머리를 욕조물에 담갔다. 강경사는 이때 욕조옆에 서서 박군의 머리가 물속에 완전히 잠기는가를 감시.
박군이 숨이차 자주 머리를 쳐들고 헐떡이자 조경위는 『괴로우면 빨리 불어라』며 을렀다. 박군은 『모른다』며 애원. 그러나 조경위는 들은체만체 이경장에게 『몇명 더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14호실에서 하군을 조사중이던 황경위와 반경장이 달려왔다. 14호실엔 부르러간 이경장이 남았다.
◇치사=11시10분쯤 경찰관들은 박군의 손을 뒤로 묶었다. 본격적인 물고문. 조경위는 뒤에서 팔장을 끼고 지시하는 가운데 반경장은 박군의 어깨를 끌어잡은 상태에서 박군의 오른팔을, 황경위는 왼편 겨드랑이 밑으로 왼팔을 넣어 각자 깍지를 꼈고 강경사는 물이 가득찬 욕조에 들어가 박군의 뒷머리를 움켜잡고 물속에 처넣었다. 꼼짝도 할수없는 상태에서 코와 입으로 연신 물을 들이키며 실신직전.
1분넘게 물고문을 해도 박군이 여전히 고개를 젓자 조경위는 『지독한 놈』이라고 투덜거리며 14호실에 있던 이경장까지 불러오게 했다.
이경장까지 가세, 다시 물고문은 시작됐다. 합세한 이경장은 박군의 발목을 두손으로 붙잡아 들어올렸다. 강경사가 박군의 머리를 움켜잡은채 욕조안으로 세게 눌러 욕조턱에 닿아있는 박군의 목은 체중과 함께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으로 바짝 짓눌렸다. 순간 정맥이 뚝, 흐름을 멈추었다. 그러나 고문경찰관들은 그런 기미를 몰랐다.
1∼2분쯤 지난뒤 조경위는 박군을 일으켜 세우도록했다. 이경장은 욕조밖으로 나오고 반경장과 황경위는 박군을 일으켜 세웠으나 박군은 의식이 없는 상태. 무릎이 꺾이며 몸이 축 늘어졌다.
깜짝놀란 조경위는 박군을 침대에 빨려 누이라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큰일을 직감한 고문경찰관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의 구명작전.
강경사는 박군의 가슴을 치며 심장마사지를 했고 반경장은 다리를 주물렀다. 황경위는 박군의 머리맡에서 입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박군은 끝내 깨어날줄 몰랐다.
조경위의 지시에따라 중앙대용산병원으로달려간 황경위가 11시40분쯤 의사·간호원을 데려왔다. 의사 오연상씨는 박군의 맥박이 멎고 동공이 열려 숨져있음을 확인했다. 추정 사망시간 상오11시20분. <김용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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