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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꽃향기처럼 매력적인 리베로, KGC인삼공사 김해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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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蘭)꽃 향기는 오묘하다. 자극적이진 않지만 은은한 향이 매력적이다. 배구의 리베로도 그렇다. 화려한 공격수처럼 돋보이진 않지만 상대 스파이크를 받아내는 선수에게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올 시즌 KGC인삼공사의 돌풍을 이끌고 있는 김해란(32·1m68㎝)처럼 말이다.

김해란은 두 가지 기록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프로배구 통산 디그 기록이다. 김해란은 323경기에서 7291개의 스파이크를 받아내 2위 남지연(6176개)에 1000개 이상 앞서 있다. 세트당 평균으로 따져도 5.908개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다. 단일 경기 최다 기록의 주인공도 김해란이다. 김해란은 2016년 2월 1일 현대건설과의 경기에서 무려 54개의 디그를 성공해 자신이 갖고 있던 종전 기록(53개)을 넘어섰다. 지난해에는 팬들이 선정한 프로배구 10주년 올스타 리베로도 뽑혔다. '미친 디그'란 별명도 선물받았다. 대전 KGC인삼공사 체육관에서 만난 김해란은 "(미친 디그란 별명이)부담스럽지만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우리 나이 서른 셋인 김해란은 여전히 절정의 기량을 뽐내고 있다. 흥국생명 공격수 러브는 "김해란의 수비는 정말 대단하다"고 놀라워했다. 서남원 인삼공사 감독도 "예전에도 전성기였고, 지금도 전성기다. 단연 우리 나라 최고 리베로"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해란은 "여기서 조금만 흔들려도 '이제 안 된다'라는 소리를 들을까 겁이 난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한다"고 했다. 그는 "저보다 선배들도 있지만 적은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먹는 것 하나까지 신경쓴다. 예전엔 치킨이나 인스턴트 음식이 먹고 싶으면 먹었는데 자연스럽게 밥을 챙겨먹게 됐다"고 했다.

김해란의 기량은 올 시즌 재조명되고 있다. 2년 연속 꼴찌였던 소속팀 인삼공사가 확 달라진 모습을 보여서다. 인삼공사는 1라운드 1승4패에 그쳤지만 2라운드에서 4승1패를 거뒀다. 13일 현재 성적은 6승6패(승점 17). 이미 지난 시즌 기록한 7승(23패)에 육박하는 승리를 거뒀다. 3위 현대건설(8승5패)과의 승점 차도 6점에 불과하다. 눈에 띄는 성적은 아니지만 올해도 최하위 후보로 꼽혔던 팀이란 점을 감안하면 '돌풍'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그런 인삼공사의 수비를 이끄는 선수가 김해란이다. 인삼공사 주포 알레나는 "김해란이 팀을 정말 잘 리드한다"며 "수비를 할 때는 일부러 김해란에게서 떨어진다. 더 많은 구역을 수비해달라는 뜻"이라고 웃었다.

탄탄한 수비의 비결을 묻자 김해란은 "순발력도 중요하지만 상대 선수의 주코스를 분석한다. 눈도 빠질 수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가슴'이다. 실수를 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 말이다. 김해란은 "특히 리시브는 어렵다. 해도해도 늘지 않는게 리시브다. 중요한 건 당일 컨디션, 자신감이다. 내 경우엔 실수를 해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미안'이란 말을 하고 바로 마음을 잡는다. 속으로는 나도 무섭지만 나를 믿고 선수들이 따라와주는데 내가 불안해하면 다른 선수들도 흔들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데뷔 15년차인 김해란에게 2014년은 잊지 못할 해였다. 13년간 몸담았던 도로공사를 떠나 인삼공사로 트레이드됐기 때문이다. 김해란은 "당시 부상이 있었기 때문에 이해는 됐다. 섭섭함이 있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계기로 더 독하게 재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적 후 바닥부터 생각한다는 마음으로 '올라가보자'는 말을 인삼공사 선수들에게 했다"고 말했다. 김해란은 "팀을 옮기면서 느낀 게 많았다. 그동안 내가 후배들을 먼저 생각해줘야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후회를 했다. 후배들이 나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소통하고, 먼저 배려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김해란이 인삼공사로 온 두번째 시즌, 인삼공사는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고편은 지난 10월 KOVO컵이었다. 인삼공사는 컵대회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며 결승까지 진출했다. 알레나가 기대 이상의 공격력을 뽐냈고, 국내 선수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으면서 점점 좋은 기량을 뽐냈다. 하지만 결승에서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김해란이 경기 초반 오른팔꿈치 부상을 입은 게 결정적이었다. 김해란은 "프로에 온 뒤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치면서 '내게는 우승이란 없는 것이구나'라고 느꼈다. 통증이 심해 '이제 배구를 그만둬야지'라는 생각까지 했다. 생각보다 큰 부상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고 말했다.

김해란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7년간 만난 축구선수 출신 남편(조성원 관동대 코치)의 배려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출산이나 은퇴 문제를 계속해서 고려하고 있다. 김해란은 "서남원 감독님이 오신 뒤 훈련과 생활 측면에서 많이 배려해주셨다. '감독님과 함께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겠다'라는 마음도 있다. 남편도 많이 배려해준다. '후회없을 때까지 하라'고 편하게 해줬다"며 "하지만 출산은 고민이다. 아이를 낳고 100% 몸 상태를 회복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정)대영 언니처럼 빨리 출산을 할 걸'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김해란의 목표는 뚜렷하다. 멀지 않은 미래에 그토록 바랐던 '첫 우승'의 꿈을 이루고, 다른 후배들이 닮고 싶은 선배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우승하고 싶죠. 당장은 욕심내지 않아요. 조금씩 달라지는 팀을 저도, 선수들도 느끼거든요. 배구를 하면서 뿌듯했던 순간이 '후배들이 롤모델이에요'라고 할 때에요. 팬들에게요? 국가대표 리베로라고 기억되고 싶어요."

대전=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사진=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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