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업 스트레스' 국내 아동, 학년 오를수록 권리는 하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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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인 정성수(11·가명)군의 하루는 쳇바퀴처럼 반복된다. 평일 점심 즈음 학교를 마친 뒤 공부방에 다녀오면 오후 7시, 학교ㆍ공부방서 내준 숙제를 하고 나면 오후 9시30분이 된다. 약 30분의 짧은 휴식을 마친 후엔 10시쯤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날 눈을 뜨면 학교로 가는 식이다. 정군은 "저녁에만 짧게 쉬니까 그 시간 동안 뭘 할 수 없다는 게 슬퍼요. 친구들과 논다거나 게임을 할 수도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정군처럼 국내 아동들은 쉴 시간도 없이 공부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학년이 오르고 학업 부담이 커질수록 아동이 누릴 권리는 악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영리단체(NPO) 굿네이버스는 지난 6~7월 학생 9000명(초등학교 4ㆍ6학년, 중학교 2학년)과 학부모 9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아동권리 실태조사 결과를 12일 발표했다. 아동권리를 ▶생존권(영양 섭취 등 기본적 삶에 필요한 권리) ▶발달권(적절한 교육을 받아 성장할 수 있는 권리) ▶보호권(차별ㆍ폭력 등 유해한 것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참여권(자신과 관련된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게 참여할 권리) 등 4개 영역으로 분석했다. 총 98개 세부항목을 설문조사해 4개 권리로 분류한 뒤 '아동권리지수'로 점수화했다. 지수가 100점 이상이면 평균보다 높다는 뜻이다.

학년별 분석 결과 초등학교 4학년의 아동권리지수가 105.9점으로 가장 높았고 초등학교 6학년(101점), 중학교 2학년(93.1점)의 순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아동의 권리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입시와 사교육 등에 따른 부담이 점차 커지면서 일상에서 느끼는 만족도는 줄어들기 때문으로 해석됐다. 이번 연구를 담당한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나친 학업 스트레스를 받는 아동들의 현실이 지수에 그대로 반영됐다. 우리나라는 외국과 비교해 학년이 올라갈수록 지수가 떨어지는 폭이 훨씬 크다는 특징이 있다. 이번 조사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대입을 앞둔 고등학생의 권리 실태는 더 안 좋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동들이 접하는 현실은 점점 후퇴하기 일쑤다.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초등 4학년이 15.4%인 반면 중학교 2학년은 39.3%로 훌쩍 뛰었다. 반면 일주일에 5일 이상 규칙적 식사를 한다는 응답자는 초등 6학년(70.8%)에서 중학 2학년(63.7%)으로 가면서 줄었다. 일주일에 사흘 이상 격렬한 신체활동(달리기·축구 등)을 하는 비율도 초등 4학년 59%, 중학 2학년 43.7%로 유의미하게 떨어졌다. 내년 고교 입학을 앞둔 박세은(15)양은 "학원 수업 시간을 맞추다보면 제때 저녁밥을 못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부량도 워낙 많다보니 밤을 새고 새벽 3시에 잔다는 친구들도 태반이다. 선배들이 '내년에 고등학교 올라가면 잠은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 씁쓸하다"고 말했다.

16개 시ㆍ도(세종특별자치시 제외) 가운데 아동권리지수가 가장 높은 지자체는 부산(107점)이었다. 그 뒤로 대구(105.7점)와 울산(104.9점), 서울(103.8점), 대전(103.6점) 등 광역시급 이상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반면 하위권에는 전북(93.7점)을 비롯해 제주(94점), 충북(95.2점), 경북(96.1점) 등 도 지역이 많았다. 지역별 아동권리가 불균등한 건 지자체별 사회복지예산, 재정자립도, 학교 시설, 아동 권리 인식 등의 차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이봉주 교수는 "지역별 아동권리 격차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인식 개선뿐 아니라 아동에 대한 투자, 빈곤 가정 지원 같은 제도적 방안이 병행돼야 한다"면서 "정부의 아동가족복지 지출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하위권인만큼 중앙정부 중심의 아동 예산 투입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학교 내 체벌 경험은 중학 2학년(17.8%)이 초등 4학년(3.8%)의 4.7배 정도 많았다. 학교 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평균 72점으로 조사됐다. 아동ㆍ청소년 자치위원회 등 정책 활동에 참여한 아동은 100명 중 4명(3.7%)으로 동아리 활동(60.1%), 자원봉사 활동(53.1%)보다 훨씬 적었다. 박세은양은 "평소 학교에서 토론 수업 등을 더 적극적으로 하면서 참여권을 몸에 익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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