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색과 시정의 "동서양 여행"|검은미녀·불태양족 등 속필사생의 극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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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여행은 또 하나의 시작」이란 말이 있다. 여기서 시작이라는 의미는 예술가들에게 다른 경험에 의한 개안으로 작풍을 생산케 한다.
호암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풍물 스케치전』은 유럽·동남아·서아프리카·미국동부쪽을 그린 네 화가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스케치의 매력은 속필에 있다. 그리고 그 속필 사생은 어떤 경지를 넘어설 때 자연스럽다.
운보 김기창의 스케치는 속도는 물론 운필이 볼만하다. 『솔베이지의 노래』로 유명한 작곡가 「그리그」의 고향 베르겐에서 여객선을 타고 가며 그린 폭포의 장관들, 남불해안 태양족들 (고희를 넘긴 동양 선비가 비키니 차림 연인들을 그린 짓궂음), 「모네」가 꽃에 묻혀 살던 정원, 흥행을 위한 레슬링으로 운보가 마음 아파했던 투우현장, 아니 그보다 런던시계탑 그림은 여섯개의 박쥐 우산을 하늘에 펼침으로써 시정이 넘치게 한다.
오승우가 만난 아프리카 오지 풍물은 원색을 아끼지 않느라. 파푸아 뉴기니 마운트하겐 시장은 그네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한데 그 인간군들과 동양에서 온 콧수염 환쟁이와의 유대감, 극락조 아래 유방을 드러낸 처녀들, 혹은 무희들, 추장과의 대화는 격식같은걸 초월해 있다. 불과 30여년전, 이 곳은 사람을 먹는 풍습이 있던 고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 화백이 그린 마사히족 장신구를 단 검은 미녀는 착해 보인다.
이규선의 여정은 여인들이 주축을 이룬다. 「고갱」이 살다 죽은 타이티섬에서 그는 원주민 여인들의 우직한 수줍음을, 방콕 에머럴드 사원의 찬란한 황금빛 문화를, 사막의 낙타 행상들을 수채화로 소묘했다.
김형근의 인도화첩은 화려한 의상 샤리와는 대조적으로 강가의 명상적 풍경을 담고 있으나 발리섬의 축제는 백화들의 어울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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