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은 윤봉길의사 의거 55돌…신용하|윤의사 시들어가던 독립열기 점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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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매헌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제14희 매헌문화제가 올해 의거 55주년을 맞아 28∼29일 충남 예산에서 열린다.
28일 전야제에서는 매헌농악단의 농악과 매헌문화의 밤 행사로 국악·연극·무용·독창 및 합창·글짓기·백일장·사생대회·씨름대회·불꽃놀이 등이 펼쳐진다.
29일 본행사로는 도중도에서 합창·국악·합기도 시범·장기자랑이 있고 민속놀이로 널뛰기·그네뛰기·연날리기 등이, 민속 오락경기로 팔씨름·토막뺏기·제기차기 등이 펼쳐진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간량리 충의사 제정은 29일 상오10시 박승선군수가 헌관이 되어 받들어진다. 윤의사 의거 55주년을 맞아 의거의 참뜻을 되새겨보는 신용하교수(서울대·사회학)의 글을 싣는다.
매헌 윤봉길의사가 1931년5월8일 상해에 도착해 백범 김구선생에게 조국독립에 헌신할 것을 결의했을 때 한국독립운동의 조건은 극단적으로 불리했다.
일제는 31년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강점했을 뿐아니라 상해에도 일제세력이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특히 같은해 7월 일본이 조작한 만보산사건으로 중국인들의 한국민족에 대한 증오가 전중국에 충만하여 한중합작의 독립운동은 커녕 한국인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의 약간의 지원조차 얻을 수 없었다.
중국과 상해에서의 한국독립운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백범 김구는 독립운동의 퇴조세를 만회하려고 임기응변의 한인애국단을 임시로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와 백범은 일제침략을 저지하고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고심하던 중 윤봉길이란 청년을 만났다. 백범선생과 윤봉길은 일제의 만행을 막고 그들의 침략행위를 온 세계에 알리기 위한 방략을 의논하고 작전을 세우려고 상해주둔 일본군의 동태를 탐사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일제는 4월29일이 일본의 천장절이므로 일본군의 상해점령 경축을 겸하여 일본군 1만명과 그들의 거류민을 총동원하여 거대한 경축식을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하여 일제의 힘을 과시하려 했다. 여기에는 상해점령 일본군사령부 수뇌들이 모두 참가할 것이 명백하므로 이 식전장소를 거사장으로 택했다.
드디어 1932년 4월사일 홍구공원에서 윤의사의 의탄에 백천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일제원흉들이 죽고 다쳤다.
윤의사의 상해의거는 한국민족 뿐만아니라 만주와 상해를 점령당하고 울분에 차 있던 중국인들을 무엇보다도 감격시켰다. 중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고려인과 윤의사에게 감사해 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는 적어도 다음의 세가지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첫째, 상해점령 일본군사령부 수뇌를 전멸시켜 일제의 중국침략을 저지시키고 상해로부터 물러가는 계기를 조성했다. 장개석은 『중국군 1백만 명이 수행하지 못한 전과를 한국인 윤봉길이 수행 했다』고 격찬했다. 중국군 참모본부는 윤봉길의사의 전과가 중국군 2개사단 희생의 전과에 해당한다고 평가했다.
둘재, 퇴조되어가던 한국독립운동을 다시 고양시키고 임시정부의 재활성화에도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다. 세째,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악감정을 연대감으로 변하게 하여 한중합작의 반일운동이 재개되었다. 1932년부터 만주와 중국에서의 갑작스러운 한중합작 무장투쟁과 반일운동의 고양은 윤봉길의사의 의거에 은혜받은 바가 매우 컸다. <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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