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황하 제4부|일 NHK취재…본사 독점연재|하원에서 발해까지…동양사 5천녀의 베일을 벗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불교가 인도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에 전래됨으로써 동양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 것은 잘알려진 사실.
이 「불타의 길」은 황하유역에 오늘날까지 찬연한 기념비를 남겨 놓았으니 돈황을 비롯한 감숙성의 병영사·맥적산, 산서성의 운강, 하남성의 공현과 용문 등 장대한 대석굴 사원군이다.
오호십육국 때 시작
이들 석굴사원의 역사는 지금부터 1천5백여년전 위·진이 멸망한 후 화북에서 생성한 오호가 증원을 지배하면서 1백여년간 계속된 이른바 오호십육국 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천길단애에 불심을 새기는 대역사는 청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을 이어왔으며 병영사 경우만해도 대소 1백96개의 석굴이 산재, 그 규모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감숙성 황하유역에 천산이 늘어서 있는 기관. 이 곳이 소적석산계이며 거기 우리 취재팀이 처음으로 찾아가는 「당술굴」이 병령사 석굴이다.
「당술」이란 감숙일대에 살았던 티베트계의 유목민 강족의 말로 「귀신굴」이란 뜻이다.
기암들이 둘러솟은 병령사 근처는 옛날에는 유명한 황하의 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서로는 청해성 하서에서 실크로드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으로 한민족이 유목민족과 전투를 되풀이한 땅중의 하나였다. 병령사 석굴은 성도 난주에서 40㎞쯤 황하를 거슬러 올라간 곳.
근래까지 이 절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했었다. 그러나 1974년 하류에 거대한 댐(중공 최대의 유가협수력댐)이 완성되어 그 험난한 길은 일변했다.
취재팀은 9월 중순에 난주에서 유가협댐으로 차를 몰았다. 유가협댐은 총저수량 57억입방m, 물의 낙차는 4백17m, 최대배수량은 매초 약 7천4백입방m, 최대출력 1백22만5천kwh라 한다.
댐 선착장에는 2척의 관광선이 정박하고 있었다.
엔진소리가 들리지 않는 단조로운 항해가 한시간쯤 계속되었을까, 사방을 에워싼 병풍바위가 갑자기 하늘을 찌를 듯한 기암으로 용틀임하는 등 거암·괴석이 수면에 비치는 광경은 「귀신굴」로 향하는 소적석산 특유의 세계였다.
이런 비경을 한시간쯤이나 지났을 무렵 대사구(병령사가 있는 지명)의 선착장에 도달했다.
선착장에서 절벽에 대어 걸쳐진 길을 따라가자 오른쪽 앞에 거대한 불상과 크고 작은 각양각색의 석굴이 보인다.
『저 마애대불(제171굴)은 당대의 것으로서 높이 27m입니다. 1967년 댐 완성때 석굴을 지키기 위해 굴 앞에 길이 2백50m, 높이 16m의 방호언제를 구축했습니다』 통역의 말.
『이 병령사에는 현재 1백96개의 석굴과 굴감(굴감)이 있습니다. 굴감 속에는 석조조상 6백94체·소상 82체·벽화도 9백평방m 남짓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굴부터 보실까요?』
미리 작정한 것이 「169굴」. 이 굴은 마애대불의 바로 위, 지상에서 50m쯤의 높이에 있는 천연동굴인데 이 병령사 석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석굴 백96개나 돼
높이 15m, 너비 26.75m, 길이 19m의 크기에 불과하나 거기엔 범인으로선 헤아리기 어려운 불기로 가득했다.
벽속에 빨려들다가 사라지기 직전 상반신만 겨우 남은 듯한 느낌인 석태불, 여래나 보살의 입상·좌상, 손이 떨어져나간 무참한 불상, 그리고 사라지다가 남은 벽화 등 표현하기 어려운 침묵의 세계였다.
오른쪽 협시보살 옆의 벽에는 가로 80㎝, 세로 50㎝ 정도의 흰 종이 흔적이 있고 표면에 희미한 글씨가 남아 있다. 이것이 병령사 석굴전체에서 가장 오랜 명문이었다. 마지막 한 줄만이 확실하게 남아있다.
『건홍원년세재현괴삼월갑사일조』.
이 「건홍」은 이 땅에 있었던 몽고계 유목민족 선비걸 복씨의 나라 서주의 연호이며 원년은 420년에 해당한다. 이 명문으로 적어도 5세기 전반에 이 굴의 조영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백여개에 이르는 병영사 석굴의 태반인 1백30개 굴은 당대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티베트불교(라마교)가 티베트고원에서 아득히 몽고고원으로 퍼진 원대에도 석굴조영은 이어졌다. 마애대불을 끼고 제169굴 반대쪽에 뚫은 제172굴에는 티베트불교의 부처, 마하카라(대흑천)가, 그리고 약간 상류에 있는 제70굴에는 가련한 표정의 11면 관음상(명대)이 있다.
한편 감숙성 천수시에 있는 맥적산 석굴은 불과 30여년전까지도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석굴이었다. 취재반은 난주를 떠나 난주와 서안을 잇는 난서공로를 타고 동쪽으로 달렸다.
천수에서 맥적산으로 통하는 길은 촉(사천)으로 빠지는 가도다. 옛날 낙타타고 1박2일 걸리던 도원경의 계곡이 이제는 차로 40분이 채 못되는 짧은 드라이브코스가 되어 있다.
「서유기」의 무대
『아까 지나온 마을은 20리 포, 지금 통과중인 마을이 마포천, 모두 <서유기>의 무대입니다』 안내인의 설명.
큰 청죽과 소나무가 총총히 나 있는 구불구불한 산길 전방에 갑자기 야릇한 모양의 독립된 봉우리가 보였다. 맥적산이다. 해발 1,742m. 농가가 수확한 보리를 쌓아올린 모양과 비슷하다하여 맥적이란 이름이 붙었다.
취재팀을 맞이한 사람은 맥적산 문물관리소 부소장 장의명씨. 50대증반의 여성이었다.
『맥적산 암봉의 높이는 1백42m, 그 3분의2까지의 높은 절벽에 1백94개의 동굴이 있고 안에 소상 7천여체와 벽화 1천평방m가 남아 있습니다. 돈황이 벽화의 전당이라면 이 맥적은 소상조각의 옹고입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지방이어서 벽화는 거의 벗겨져 나갔습니다.』
석굴 속에 남은 명문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6세기 초엽의 것. 『경명삼년구월십오일…』이라고 쓴 것이 제115굴에 남아있다. 북위선무제 시대, 서기 502년이 되는 셈.
『전성기는 남북조시대 북위, 그리고 북위가 동서로 분열한 뒤인 서위 무렵입니다. 그후에 수·당·송·원·명·청으로 이어지면서 불상의 조상·보수가 거듭되어 왔습니다.』
이 맥적산에서 취재팀의 표적은 두개의 굴, 북위굴인 제123굴과 제44호 서위굴이다.
수대에 조성된 높이 17m의 거대한 마애불을 본 후 제1굴 이반동, 그리고 벼랑의 일면에 키 15㎝에 불과한 작은 부처가 가득히 파여있는 천불랑을 거치자 대망의 제123굴이 나왔다.
마애대불의 얼굴 바로 옆에 입구 높이 1m, 너비 90㎝정도의 조그만 굴이다. 『맥적산 1백94개 굴 중에서 가장 우아한 굴의 하나입니다』 안내인 장씨의 말.
자물쇠를 열어달래서 안에 들어가자 약간 넓어져서 높이·너비·깊이가 2.5m 정도인데 그래도 세 사람이 들어서자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이 좁은 굴 3면에 불상이 있었다. 정면 불감(불감)에 석가, 그리고 두 협시보살과 아난, 가엽두 제자상, 좌우의 벽에는 불감이 있고 왼쪽에 유마결거사, 오른쪽에 문수보살이 각각 공양동자·동녀를 거느리고 있다.
을불황후애사 전해
그 중에서도 오른쪽 문수보살은 갸름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담은채 살짝 머리를 숙이고 앉은 모습은 「청초한 풍정」이외엔 더 이상 표현할 말이 없다.
제123굴을 나와 가파른 계단을 곧장 내려가면 제43굴에 닿는다. 표적인 제44굴은 그 옆에 있다.
제43굴은 별칭이 적릉으로 애사를 담은 무덤이다. 무덤의 주인공은 을불황후, 서위 초대황제비다.
을불은 하남 낙양사람. 미녀로서 16세에 문제비가 되었다. 검소하였고 인정이 많았으며 남녀 12자녀를 낳았으나 거의 단명이었고 태자 무도왕무만이 장성했다. 유유(유연, 같은 몽고계의 유목민족)이 국경에 출몰하여 그 침략을 막기위해 황제는 책략결혼으로 새 왕비 도후를 맞고 을불황후에게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도록 명령했다. 을불비는 아들 진주책사 무도왕에게로 갔다.
문제는 얼마후 을불을 다시 불러들일 계획을 은밀히 추진했는데 대통 6년(540년) 봄 이를 눈치챈 유유군이 도유의 입장을 지기기 위해 침공, 황제는 별 수 없이 을불황후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명령했다. 황후는 눈물을 흘리면서 승려를 불러 수십 명의 시녀를 스스로 머리를 깎아 출가 시킨뒤 자결했다. 31세였다.
14세에 문제비가 된 도후도 2년 후에 출산을 하다가 덧없이 죽었다. 『북사』에는 이 죽음이 을불황후의 원한 때문인 것처럼 적혀 있다.
그 을불황후의 능 바로 옆에 신비의 제44굴이 있다. 자물쇠 잠긴 문을 연 순간, 눈에 확 들어오는 부처의 모습에 누구나 숨이 막힐 것이 분명하다.
그만큼 아름답다. 맥적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이다. 장씨는 이 불상이 을불황후의 시녀라는 설이 있다고 설명한다. 1500년 전의 갖가지 정념이 지금도 불상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