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헤」와 「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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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1세기이전의 독일어에는 「창문」이라는 낱말이 없었다. 그저 「빛이 들어오는 구멍」으로 쓰였을 뿐이다. 그만큼 독일어는 유렵의 다른 언어에 비해 발달이 뒤늦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 독일어는 가장 사변적인 언어로 발달했다. 많은 철학자들이 모국어를 갈고 닦았기 때문이다.
「야스페르스」가 『우리는 언어와 더불어 비로소 사유할수 있다』고 한 말이나, 프랑스군이 독일을 점령했을때 국어를 잃지 말라고 역설한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 그 대표적인 예다.
국어연구소가 24일 발표한 「한글맞춤법및 표준어규정 개정시안」은 또 한차례 「한글 맞춤법 파동」을 몰고올 듯하다.
53년4월27일 「국무총리훈령 제8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철자법은 복잡 불편한 점이 불소함에 비추어 차를 간소화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분부도 누차 계시기에….』
한자투성이의 이 훈령이 그 후 2년반동안 나라안을 온통 물끓듯하게 한 이른바 「맞춤법 파동」의 서곡이었다.
국회가 열리고, 한글학계가 망라된 위원회가 구성되고, 학술원의 중의를 모았지만 결국 「부」로 낙착되었다.
문교부의 최현배평수국장에 이어 김법린장관이 물러났지만, 장관자리는 70여일이 자나도록 공석이었다.
뒤늦게 이선근장관이 취임하고 석달만에 내놓는 것이 「밋다」(신), 「맷다」(결), 「갑다」(보), 「안다」(좌), 「꼿」(화)-「꼬치」, 「노피」(고), 「부억」(부엌), 「젓」(유), 「조치 안타」(좋지 않다) 등 「한글 간소화」안이었다.
그러나 한글을 1백년이상 후퇴시킨 이 안은 더욱 거센 벽에 부닥쳐 결국 좌초하고 말았다.
표준어률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고 새톱게 정의한 이번 시안은 일부 긍정적인 측면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교양인」이 쓰기에는 어처구니 없는 용례가 너무 많이 눈에 뛴다.
가령 「우리의」를 「우리에」, 「주의」를 「주이」로 같이 쓰도록 한것은 분명히 교양있는 사람의 말씨가 아니다. 더구나 「은혜」를 「은헤」로 고치자는 대목은 30여년전의 간소화안보다 한 술 더 뜬 느낌마저 든다.
또 「넓적」(평평한 생김새)을 「넘적」(재빠른 움직임)으로 고치면 어휘선택에도 더욱 혼란을 가져온다. 『말은 생각의 옷』이라고 한 「존슨」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국어의 어휘를 늘리기 커녕 오히려 축소내지 간소화하는 것은 국민의 사고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밖에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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