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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졸리앙의 서울일기

(20) 폭력에 대한 처방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폭력의 씨앗’ 될 수 있는 두려움·무지·집착·편견 몰아내야

안타깝게도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에서 승리한 다음 날, 나는 우연히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폭력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분노와 좌절, 증오의 그릇은 어떻게 비워내나. 거친 행동 없이 우리 안의 공격성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단 말인가.

니체는 『여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에고이즘에 대한 견해가 어떻든 대다수 사람은 정작 자신의 에고를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위 시선이 빚어놓은 에고의 허상을 위해서만 온갖 짓을 저지른다.” 우리 자신의 에고이든 주위 시선에 의한 에고의 허상이든, 그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이거나 어쩌면 각자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볼 절호의 기회가 돼 줄 것이다.

 과연 분노의 질곡으로 걸어 들어가는 대신 빛을 향해 발길을 돌릴 수 있을까. 영혼의 위로와 치유를 위해 지금 당장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까.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라고. 천사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이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는 것이야말로 불행이 가장 바라는 일이라고.

프로이트는 인간에 내재한 폭력의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제안을 했다. 우리가 가정이나 직장에서 평소 느끼는 쾌감의 강도와 철천지원수를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패는 순간 느낄 쾌감의 강도를 서로 비교해 보라고. 그러면 우리 각자의 내면에 폭력의 욕구가 얼마나 교묘하게 웅크리고 있는지, 간과할 경우 매우 큰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야만성이 얼마나 끈질기게 잔존하고 있는지 깨달을 거라고 말이다.

문제는 그런 폭력의 욕망이 이따금 뜻밖의 우회로를 통해 스스로 만족을 얻어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고통에 시달릴수록 그 고통을 덜어줄 희생양을 찾고자 하는 강한 유혹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그런 인간의 속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자기가 앓고 있다고 생각하는 신자에게 사제가 이렇게 일렀다는 것이다. “맞아요. 한데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오. 당신의 잘못 때문에 당신 스스로 앓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시오.”

진정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분노를 뛰어넘는 사람이다. 그리고 분노를 뛰어넘으려면 그 뿌리에 도사린 고통부터 찍어 내버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폭력적인 사람이야말로 피 흘리는 마음과 갈기갈기 찢긴 영혼의 소유자임을 확신한다. 폭력의 욕구에 쉽사리 무너지는 사람을 악당이나 사악한 인간으로 취급하기보다는 그 마음속에 도사린 질병의 정체를 꿰뚫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일부러 악을 행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충분히 행복하면서도 흉포한 짓을 저지르는 사람 또한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언제 서로를 향할지 모를 내면의 발톱들을 뿌리뽑기 위해, 더는 폭력의 유혹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서로를 펀칭볼로 착각하는 얄궂은 습성부터 버려야 한다. 폭력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두려움, 무지, 집착, 편견의 독소들을 각자의 마음에서 몰아내야 한다.

그래야 어쩌다 폭력이 발생해도 아무도 해치지 않으면서 모두를 자유롭게 해주는 진정한 평화가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진 생명의 에너지를 신속하게 끌어모을 수 있다.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