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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 강유정의 까칠한 시선] 경쟁만 없어진다고 유토피아인 것일까?

중앙일보

입력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어린 시절 내게 작은 배신감을 안긴 것 중 하나가 바로 TV 애니메이션이었다. 철이와 메텔(은하철도 999)·캔디(들장미 소녀 캔디)가 일본 만화 주인공이었다니. 심지어 밍키(요술공주 밍키)·세일러문(달의 요정 세일러문)도 더빙 덕에 한국어로 말할 뿐, 사실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애니메이션이 다른 나라에서 만든 것임을 알게 된 후 ‘결국 철이도 원래 철이가 아니었겠구나’라고 깨달았다.

과거 지상파 방송사에서 더빙해 방영한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대결 구도로 진행됐다. 주인공이 선(善)이라면 그를 위협하는 악(惡)의 무리도 반드시 등장한다. 또한 세계 평화를 지키는 영웅의 활약이 주된 이야기였다. 오죽하면 ‘달의 요정 세일러문’(1997, KBS2)에서 세일러문이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고 외쳤을까. 이상한 나라에서 펼쳐지는 폴(이상한 나라의 폴)의 모험에도, 주전자를 이용해 시간 여행하던 돈데크만(시간탐험대)의 세계에도 선악 대립은 있었다. 매회 대결을 펼치고 진화를 거듭한 ‘포켓몬스터’(1999, SBS)는 아예 경쟁과 갈등을 서사의 축으로 삼았다. ‘승자독식(勝者獨食)’이나 ‘각자도생(各自圖生)’처럼 승부욕을 자극하는 말이, 일본에서도 한국만큼 보편적이었나 보다.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를 치르기도 하며, ‘어떤 학교에 들어가느냐’로 그 아이의 인생 승부를 점치기도 하니까. 사실 일본 사회의 이러한 경쟁 구도, 선악 구별, 대결 양상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문화다. ‘배틀로얄’(2000, 후카사쿠 킨지 감독)처럼 극단적인 경쟁을 다룬 스릴러영화를 아마 한국 사람들도 별다른 각주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초등학교 여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모은 애니메이션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됐다. 제목만 들어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TV 시리즈 ‘아이엠스타:꿈의 오디션!’(투니버스, 이하 ‘아이엠스타’)이 그것. 높은 인기에 힘입어 지난 2월 11일 ‘극장판 아이엠스타:꿈의 오디션!’(야노 유이치로 감독)이 개봉한 데 이어, 9월 14일 ‘아이엠스타 뮤직어워드’(와타다 신야 감독)도 극장 상영을 시작했다. ‘아이엠스타’는 명문 아이돌 양성 학교가 배경이다. 소녀들은 ‘아이돌 스타’가 되기 위해 이 학교에서 훈련을 하고 실력을 기른다. 체력 기르기·외모 가꾸기·노래 부르기 등 이곳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연예기획사 연습생의 일과와 매우 비슷하다. 화려한 의상, 현란한 무대, 장식적 음악이 끊임없이 흐르며 여자아이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아이엠스타’의 경우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식이 기존 일본 애니메이션과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여기에서는 대결이나 경쟁이 부각되지 않는다. 이는 실상 ‘프로듀스 101’(Mnet) 등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목격해 오던 것과도 다른 양상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전 일본 애니메이션은 대체로 적을 입체화하여 주인공을 부각시키곤 했다. 반면 한국 TV 애니메이션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달려라 하니’(1988, KBS2)는 조금 달랐다. 이 만화에서 주인공이 진정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의 어려운 형편, 부족한 체력 등을 적으로 삼아 끊임없이 수련하여 극기에 힘쓰는 걸 한국적 미덕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아이엠스타’의 소녀들도 도무지 경쟁하지 않는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경쟁과 대결이 존재한다. 유닛으로 구성된 여학생들이 실력을 겨루고, 그중에서 우승을 가리는 에피소드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서는 오로지 순도 100%의 성취감을 강조할 뿐이다. 즉, 패자는 전혀 슬퍼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다. 승자 또한 상대방을 이겼다고 해서 우쭐대지 않는다. 이긴 쪽은 패자를 겸손한 자세로 대하고, 진 쪽은 승자에게 존경을 표한다. 승부의 과정은 언제나 공명정대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대결은 있으나 갈등은 없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의 자리를 외모지상주의와 상업주의가 차지했다는 점이다. 더 예쁜 아이가 더 많은 인기를 누리는 세상. 소녀들은 예뻐지기 위해, 강력해지기 위해 더 많은 아이템을 가져야 한다. 인물과 인물의 대결이 아니라, 이상의 수준을 끝없이 높여 점점 많은 걸 갖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것이 선인 셈이다. 경쟁과 대결이 사라진 세계는, 곧 갈등 없는 유토피아의 재현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 세상이 정말로 갈등 없는 유토피아일까? 무언가를 사는 것은 쉽고, 누군가와 대결하는 것은 어려운 이 애니메이션의 인기가 어쩐지 씁쓸하다. 경쟁 및 갈등 서사가 빠진 인공적 화해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구매’만이 자기표현 수단이다.

글=강유정 영화평론가. 강남대학교 교수. 허구 없는 삶은 가난하다고 믿는 서사 신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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