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배려 보여준 아베와 트럼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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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과 비공식 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시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과 비공식 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시스]

17일 저녁 6시32분 미국 뉴욕 맨해튼 인터컨티넨털호텔 1층.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과의 회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아베 신조(安倍晉三) 총리의 표정에선 안도감이 느껴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총리의 34년 그림자 비서관에서 지금은 '아베의 정치 전략가'란 호칭을 듣는 이지마 이사오(飯島勳·71) 내각관방참여(자문역)과 하세가와 에이이치(長谷川榮一·64)총리보좌관의 얼굴도 흡족해 보였다.

잠시 자신의 방에서 참모들과 '대와 발언 수위'를 조절한 아베가 기자들 앞에 나타나 발표한 메시지는 딱 두 가지.

첫째는 "비공식 회담이라 자세한 회담 내용은 밝힐 수 없다"는 것. 아직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트럼프와의 대화를 일일이 밝힐 경우 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결례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매우 따스한 분위기 속에서 흉금을 터 놓고 대화했고, 트럼프는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확신했다"고 강조하는 대목에선 아베의 손 제스처가 커졌다. "서로 괜찮은 시기에 다시 만나서 보다 넓고 깊게 이야기를 나누기로 합의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 이날 회담은 양측의 이해가 교묘히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을 예상하고 지난 9월 유엔총회 방문 시 클린턴만 만나고 갔던 아베 총리로선 재빨리 트럼프 측과 관계를 트고 신뢰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트럼프가 가장 먼저 만난 외국 정상'이란 효과도 챙겼다. 반면 트럼프로선 자신의 당선을 부정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이어지고 있고, 인사를 놓고도 잡음이 불거지고 있는 상황에서 주요 동맹국 정상과의 만남을 통해 '대통령 다움'을 대내외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날 회담에선 서로에 대한 배려가 유독 눈길을 끌었다.

아베는 이례적으로 약속시간 10분 전에 회담장인 트럼프 타워 꼭대기층 트럼프의 자택에 도착했다. 사전에 정해 둔 비공개 통로를 통했다. "터놓고 깊숙한 대화를 하고 싶다"는 트럼프의 요청을 받아들여 통역과 단둘이서 회담장에 들어갔다. 트럼프도 마찬가지였다. 각료 인선 작업에 분주한 일정이었지만 "아베 총리에게 꼭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을 의식한 아베 측이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회담 시간도 당초 예상했던 1시간에서 30분이나 길어졌다. 게다가 트럼프의 '오른팔' '왼팔'로 불리는 장녀 이방카와 사위 재러드 쿠슈너를 대기시켜 소개했다. 또 이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내정돼 명실공히 '트럼프의 외교 총괄'이 된 마이클 플린 전 국방정보국(DIA) 국장도 인사시켰다. 회담 후반부에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 당선인을 합석하게 했다. 트럼프는 또 회담이 끝난 뒤 트럼프타워 밑 차량 대기장소까지 내려와 아베를 배웅했다,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한마디로 서로가 최상의 예우를 갖추며 신뢰쌓기에 나서는 모양새였다. 회담 후 아베는 트럼프에 골프 드라이버를, 트럼프는 골프 셔츠와 골프용품을 아베에 선물했다. 공통의 취미를 강조한 것이다.

일 정부 관계자는 "두 사람은 참으로 케미스트리(호흡)가 잘 맞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트럼프도 회담 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 자택을 찾아 훌륭한 친구 관계를 시작하게 된 것은 영광"이란 글과 사진을 올렸다.

한쪽은 '정치 로열 패밀리'에서 태어난 귀공자이고, 다른 한쪽은 외교·안보라고는 알 지도 관심도 없던 사업가 출신. 하지만 두 사람 간에는 공통점이 많다. '강한 국가의 부활'을 외치고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도모하며 중국의 부상을 경계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국가(사업)의 이익'에 도움이 되면 누구보다 발빠르게 '직감'에 의한 결정을 하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아베의 트럼프 회동은 10일 전화회담에서 돌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트럼프 타워에서 만난 정권인수위원회 담당자는 익명을 요구하면서 "대선 전부터 일본 측 관계자들이 당선인 패밀리(누군가는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와 공화당 주류 출신 인사("프리버스 백악관 비서실장 내정자이냐"고 묻자 "상식선에서 보면 된다"고 답했다)라인을 통해 꾸준히 (트럼프) 당선 시의 '트럼프-아베' 조기 회동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고 말했다.

정부만 나선 것이 아니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이미 대선 전부터 일 야당 중진 인사가 트럼프타워에 거의 상주하면서 트럼프 선거대책본부 관계자들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주인공은 가메이시즈카(龜井靜香) 전 금융담당상(80). 자민당 출신이지만 2005년 우정민영화에 반대해 탈당, 이후 연립여당→군소야당 대표→무소속을 거친 13선의 보수파 중진이다. 가메이는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부터 트럼프 측에 꾸준히 면담을 요청했다. "선거전 과정에서 나온 한·일 핵무장 용인 등의 발언을 듣고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는 것이다. 선거 직전인 7일 오후에 트럼프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은 가메이는 트럼프타워 14층 선대본부에 매일 출근해 아예 자리를 펴고 '조언'에 나섰다. 트럼프 선대본부 관계자들에게 시종 "내가 13선 의원이다.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사나이다. 가장 중요한 건 최후의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 격려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돌출행동에 버거워하던 트럼프 캠프 관계자들도 호탕한 가메이의 열정에 반해 팬이 됐다고 한다. 결국 '트럼프-가메이' 면담은 취소됐지만 이는 '트럼프-아베' 면담의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일찍부터 정부와 의회, 그것도 야당의원까지 나선 총력전의 결실이었던 셈이다.

일본 측 관계자는 이날 회담에서 아베는 의도적으로 예민한 주제는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전했다. 섣불리 초반부터 어긋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트럼프 측도 사전에 미 국무부 브리핑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아베는 트럼프 측에 지 몇가지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

먼저 자신이 금방 물러나지 않는 '장수할' 동맹 지도자란 점이다. 아베는 이날 "당신과 '장기적으로(long-term)' 친밀한 사이가 되고 싶다"는 말을 몇차례 던졌다고 한다. 아베의 임기는 2018년 9월까지다. 하지만 내각지지율이 60%를 넘어서는 '고공 인기'로 내년 3월 자민당 승인을 거쳐 2021년 9월까지로 연장될 게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지지율 5%에 허덕이는 우리의 사정이 오버랩돼 착잡한 기분이었다. 아베 총리 숙소 로비에서 만난 일 정부 고위 인사는 기자를 알아보곤 대뜸 "한국은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었다 그는 "부부가 집에서 싸우더라도 밖에 나와선 사이좋게 하는 법인데 박근혜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도 못오는 건 좀 심했다"고 걱정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또 하나는 방위비 분담금 문제. 일 정부 관계자는 아베 총리가 이 문제를 이날 회담에서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했는지는 확인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다니구치 도모히코(谷口智彦) 내각 참여(자문역)가 회담 하루 전 CNN 등에 출연,"독일은 (방위비 분담 비율이) 23%, 한국은 26%, 일본은 54%"라며 대대적인 홍보전에 나섰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일본은 한국(독일)과 다르다"란 점을 미국 언론을 통해 호소한 것이다.그는 지난해 4월 아베의 미 의회 합동연설 문안을 미국 측과 협의해 다듬었던 측근이다. 한국 정부는 "우리 분담률은 50%"라고 주장한다. 일본 측이 어떤 기준으로 그런 숫자를 인용했는지는 모르나 한국 정부가 "일본이 (이번 회담에서) 방위비 분담금 문제를 해결해주면 좋겠다"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면 큰 착각이었던 셈이다.

뉴욕=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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