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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은 제2의 6·29선언을, 야권은 양김 분열 곱씹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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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최순실 국정 농단 87년 교훈으로 본 해법

지난달 31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의원총회에서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걱정을 합니다. 6월 항쟁은 성공하고 12월 대선에서 패배했던 1987년의 경험을. 우리는 정권을 쓰러뜨리는 게 목표가 아니고 건설하는 게 목표가 돼야 합니다.”

민심 거스른 전두환 4·13 호헌조치
대통령 비호만 하는 지금 여당 모습
6·29 선언처럼 버려야 기사회생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첫 번째 촛불집회 이틀 후 나온 말이었다. 정치권에선 현 정국이 87년 6월의 ‘데자뷔’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헌법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대통령, 시위 물결, 그리고 그런 흐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정치권의 상황 등이 판박이다.

◆6·29 대신 4·13 에 가까운 청와대·여당

국정 혼란에 사과하며 성실하게 검찰 수사를 받겠다던 박 대통령은 일주일 만에 태도를 바꿨다. 박 대통령의 유영하 변호사는 지난 15일 “변론 준비가 필요하다. 서면조사가 바람직하다”며 검찰의 대면조사 방침을 사실상 거부했다. 박 대통령은 그간 두 차례 대국민담화(지난달 25일, 지난 4일)에서 던질 걸 던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논란을 키웠고, 김병준 총리 후보자를 야당과 협의 없이 전격 지명해 정국 상황만 악화시켰다. 급기야 퇴진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지난 16일 김현웅 법무부 장관에게 엘시티(LCT) 비리 의혹 수사를 지시해 반격에 나섰다는 말을 듣고 있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당권 수성에 몰두하고 있다. 당 안팎의 사퇴 요구에 대해 친박계인 이정현 대표는 “가장 힘든 박 대통령을 도울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달라”며 버티는 중이다. 그러자 새누리당 사무처 당직자 120여 명이 비상총회를 열고 이 대표 사퇴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직자들이 당 대표 사퇴를 촉구한 것은 보수정당 역사상 처음이다.

민주화 요구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던 87년 6월 여당인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박원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당시로선 여당에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이길 인물이 없었던 만큼 민심에 대한 백기 투항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여당은 벼랑 끝에서 살아났고 대선도 승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여당의 행태는 "민주화 요구를 거스른 4·13 호헌에 가깝다”(가상준 단국대 교수)는 평가다. 4·13 호헌이란 87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야권과 시민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를 말한다.

◆민심과 따로가는 야당

야권은 민심과 따로 가고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지난달 24일 JTBC의 ‘태블릿 PC’ 보도 이후 박 대통령의 2선 후퇴와 거국내각 구성을 두고 이견만 노출해왔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지난 14일 야권과 상의 없이 영수회담을 추진했다가 내부 반발로 철회했다. 이 일로 국민의당과의 신경전만 가열됐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추 대표의 영수회담 추진을 두고 “추미애의 최순실이 있다”고 비꼬았고, 비선으로 지목된 김민석 전 의원은 박 위원장에게 “국민의당 대표나 잘하세요”라고 받아쳤다.

대선 주자들은 각각의 셈법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목소리를 키워왔다. 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지난달 26일 청와대에 “거국중립내각을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대통령의 하야를 제일 먼저 거론했다. 김용철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그동안 야권 대선주자들이 보여준 모습은 자신의 이익에만 매달리는 것 그 자체였다”며 “안 전 대표의 제안으로 문재인 전 대표 등이 함께 만나기로 했지만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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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당시 야권의 지도자인 YS와 DJ는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기반으로 공동 투쟁했다. 언론 통제 해제, 정치범 석방, 대통령 직선제 등 5개 항을 내걸어 모두 얻어냈다. 하지만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되자 분열했다. 87년 12월 18일 야권이 63.3%의 득표를 하고도 대선에 패배한 다음날 본지의 사설은 이렇게 맺었다. “박수와 환호를 보낸 국민들의 갈망과 요구를 이들은 양보할 수 없는 탐욕 때문에 허공에 흩어버리고 말았다.”

유성운·박유미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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