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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일 “음악신동? 14살에 돈 벌려고 데뷔한 소년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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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연극·설치미술·무용·패션·전통 등에서 전방위로 활동해 온 정재일은 “이젠 한가지에 깊숙이 천착해 나만의 색깔을 짙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극·설치미술·무용·패션·전통 등에서 전방위로 활동해 온 정재일은 “이젠 한가지에 깊숙이 천착해 나만의 색깔을 짙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일까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되는 국립창극단의 신작 ‘트로이의 여인들’(연출 옹켕센·극본 배삼식·작창 안숙선)은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수작이다. 작품의 기조는 미니멀리즘. 무대도 동선도 심플하다.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오로지 판소리 자체에 집중한다. 1시간50여분의 무대는 후다닥 지나간다. 음악적으로 풍성하기 때문이다. 작곡가 겸 음악감독 정재일(34)의 힘이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음악감독 맡아 창극 무대 첫 도전
“처절한 캐릭터엔 아쟁, 복수엔 대금
배역마다 지정, 국악기의 재발견”

정재일은 1996년 14세의 나이로 데뷔했으니 어느새 음악인생 20년이다. “전 세계에서 나만큼 이것저것 다 기웃거린 사람 없을 것”이란 본인의 말처럼 음악 편력은 다채롭다. 연극·설치미술·무용·패션·전통 등에서 전방위로 활동해왔다. 창극은 첫 도전이다. 국립창극단 김성녀 예술감독은 “정재일이란 독특한 아티스트를 만나 창극이 훨씬 모던해지고 풍성해졌다”고 전했다.

무엇에 역점을 두고 작업했나.
“조미료 싹 빼고 철저히 원재료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어떡하면 판소리를 잘 들리게 하느냐가 포인트다. 주요 캐릭터마다 국악기를 하나만 배치시켰다. 배역별로 지정된 악기가 소리꾼과 짝을 이뤄 극을 이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안드로마케는 자식이 죽는데 그 살인자의 처로 끌려간다. 단순한 슬픔을 넘어 기구한 삶의 굴레다. 찢어지는 아픔을 전달하는 데 아쟁만한 악기가 없다. 음색이 처절하기 때문이다. 또한 복수의 아이콘 카산드라역엔 대금을 활용했다. 대금은 특이하다. 한적한 숲속에서 대금 소리가 들리면 청아하기 그지없는데, 붉은 색의 배경 화면에서 울려퍼지면 뜨거운 열기를 전해준다. 환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한다. 헤큐바와는 장엄한 거문고를, 남성 역할엔 바라와 꽹과리 등 타악기를 연결했다. 국악기의 재발견이다.”
본인도 직접 무대에 등장하는데.
“헬레나와 짝을 이루는 건 피아노다. 유일한 서양악기다. 여태껏 그리스 신화에서 헬레나는 배신의 상징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선 절대적 미(美)의 존재로 그려진다. 서정성을 표현하는 데 화성악기인 피아노가 적합했고, 그걸 연주하기 위해 무대에 섰다. 가장 아름다운 여성인 헬레나를 남자 배우 김준수(국립창극단)가 연기한다. 고작 10여분 출연하는데 무척 인상적이다.”
어떻게 14살에 데뷔하게 됐나.
“어릴때부터 피아노·기타를 독학으로 배웠다. 초등학교 6학년때는 고등학교 형들과 록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다 중2때 ‘서울 재즈 아카데미’란 학원을 다녔고, 강사중에 한상원·정원영 선생님도 계셨다. 어느날 두 분이 ‘우리가 밴드 만드는 데 와서 베이스 연주해 달라’는 거 아닌가. 그게 한상원·정원영 밴드였다. 같은 해 영화 두 편의 편곡도 하게 됐다.”
음악신동인 터라 집안도 유복했을 거 같다.
“집안에 나 말고 음악하는 사람은 없다. 부모님은 어릴때 이혼했다. 아버지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랑 둘이 살아서 난 중학교때부터 이른바 소년 가장이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일찍 데뷔한 것도 그런 이유다. 나에게 음악이란 편안히 음미할 수 있는 유희가 아닌,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였다.”
앞으로 계획은.
“박효신과 공동작곡한 ‘야생화’가 히트했지만 난 대중과의 소통에 둔감했다. 창작자의 치열함보단 소비자로서의 유랑을 더 즐긴 것도 사실이다. 장르 불문하고 그저 뛰어난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에 자족해했다. 이젠 좀 달라질 때가 아닌가 싶다. 한가지에 깊숙이 천착해 ‘정재일표 음악’을 구축하고 싶다.”

글=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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