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박자 한음계 낮추는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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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백성은 가난한 것은 조심하지 않으나 고르지 못한 것은 슬퍼한다는 말이 있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요즘 여권과 야권이 팽팽하게, 그리하여 숨이 막힐 것 같이 평행선을 용케도 유지하며 강경 대 강경으로 줄달음치고 있다. 보기에도 답답하거니와 이대로 가다가는 필경엔 파국의 늪구덩이로 또 한 차례 곤두박질하지 않을까 지극히 염려되는 나날이다.
여당은 여당대로 모든 일을 힘으로 밀어붙인다. 힘을 앞세운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고 문호개방을 수시로 강조하나, 힘을 앞세운 대화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일 수 없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다가 야당은 야당대로 촌보라도 뒤질세라 손님(여당)이 실수하길 기다리며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는다.
두 김씨가 이끄는 쌍두마차에선 사공도 많고 말도 많고 달도 많아 바람 잘 날이 없어 국민의 지지기반을 날로 잃어 가고 있다. 그러다가도 트집이 될만한 사건(?)이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일시적으로 단결된 힘을 과시하며 북 치고 나팔부는 격이 되고 있으니 안타깝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란 그럴싸한 명분만을 구호로 내걸며「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고 파출소마다 씌어 있으나「무엇을 트집 잡을까요」로 국민간에 읽히고 있음은 지극히 슬픈 일이다.
또한 어느 법 조항에 근거를 단단히 두고 하는 일인지는 모를 일이나 가두 검문검색을 늦추질 않고 있다. 또 예전 동헌의 앞뜰에서 곤장으로 죄인을 다스리던 폐습의 못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대낮인데도 밀실에서 고문을 자행하다 한 떨기 꽃을 지게 했으니 암울한 이 시대를 살아가며 호롱불이라도 켜들고 진정한 의미의「민중의 지팡이」를 찾아 나서야 할 판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정부와 여당은 선진조국과 복지사회를 건설하는 민주화 대열에 동참하길 희구하나 인권과 언론자유가 존중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정의사회 구현이란 꿈 같은 이야기요, 구두선일 따름이다.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민주화란 허구일 뿐이다.
경찰이 박종철군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민주경찰로서 국민에게 봉사하는 경찰상을 실현하기 의해 결의를 다지며 선서하는 모습을 우리는 지켜봤다.
그러나 그 사진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경찰은 추도집회를 원천적으로 2중 3중의 사람 벽을 만들어 봉쇄했다.
이제 국민은 쉽게 흥분도 않거니와 쉽사리 속아넘어가지도 않는다.
야권에서 삐라하며 수많은 각종 유인물까지 만들어 홍보에 홍보를 거듭했지만 서울시내의 모든 차량이 경적을 일제히 울려주지도 않았고 사찰과 성당과 교회에선 타종하는 대열도 쉽게 만날 수 없었다.
어디 그 뿐인가. 검은 리본을 가슴에 단 시민도 가뭄에 콩 나듯 인색했고 시민들은 아예 길거리에 나서는 일마저 주저하는 듯 했다.
야권의 생각 같아서는 사회의 혼란이 오든 말든 서울시민이 온통 명동으로 몰려오길 바랐을 게고 정부와 여당에서는 국민 모두가 마음으로 애도를 묘해 스스로 행동을 자제해 주길 학수고대했을 게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 명동의 추모집회는 여당의 승리도 야당의 승리도 아닌 정국의 혼란과 사회의 불안만을 자초했을 뿐, 지켜보는 국민다수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심사 가눌 길 없고 이 땀의 백성으로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솔직이 말해서 이민우 구상이 온천과 산행으로 뒤엉키면서 백지화되자 저으기 일관성이 없는 분열된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 준 꼴이 된 야당에서는 탈출구를 찾아 속앓이 병을 앓을 무렵, 고문 경찰은 기막히도록 좋은 구실을 만들어준 셈이 된다. 야권에서는 이 기회에 흩어진 전력을 재정비해 강화하고 역공세를 펴 국민의 지지기반을 구축하고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끼리 같은 영혼을 위해 두 번씩이나 추모집회를 구상했으니 가히 그 저의가 손바닥의 구슬을 보는 듯한 뻔한 느낌마저 없지 않다.
사회가 불안하고 정국이 형평을 잃게 되면 국민이 기대어 귀의할 곳은 사찰이자 성당이며 교회일게 분명하다. 침묵이 금이라지만 성직에 있는 분들이 민중의 아픔과 형제자매들의 슬픔을 외면하고 침묵만으로 일관한다면 그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터이다.
그러나 성직에 있는 분들이 대화와 이해의 문을 닫고 흥분하는 소수의 군중편에 서서 오히려 그 군중심리에 불을 지르는 역작용의 휘발유 역할을 자처한다면 가뜩이나 메마른 척박한 이 풍토에 정신적인 귀의처마저 국민다수가 잃어가지 않을까 염려되는 마음 또한 없지 않다.
물론 명동성당이, 그리고 기독교회관이 이 땅의 민주화를 구가하는 살아있는 메카로서 많은 기록과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자타가 인정하고 있는 바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 투쟁적이며 선동적인 설득력 없는 반대는 없었는지 한번쯤 반조 할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지극히 껄끄럽게 일부에서는 받아들일지 모를 일이나 왜 두 차례나 열리는 추모집회에 부산의 형제복지원 등에서 매맞아 죽은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추모는 곁들이지 않았는지 무거운 마음으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직에 있는 분들은 자중 자애하여 이번 사건을 계기로 모든 일을 회광반조해야 한다. 정부와 여당만의 잘못만을 크게 확대할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와 사명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깊이 조명해 볼일이다.
성직에 있는 분들이 한 음계 낮추고, 한 박자 늦추어 대화와 설득으로, 지혜와 포용으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불안요소를 잠재워야 할 것이다.
여당도 우리 형제요, 야당도 우리 자매다.
여권에 있는 자들은 모조리 부패했고 야권에 있는 자들은 한결같이 투쟁만을 일삼는 투사일수만은 없는 것이다.
진정, 평행선으로, 강경 대 초 강경으로 치닫는 오늘의 현실에서 모두 다 깊이 반성하여 국민의 절대적인 여망인 합의개헌에 지혜와 슬기를 모아주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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