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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미국] “외교도 경제도 거래로 생각…트럼프, 상대 힘든 변칙복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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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헷갈린다. 제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는 신자유주의 신봉자인가.

“감세, 규제 철폐” “1조달러 대공사”
상반된 정책 주장처럼 보이지만
원래 신념 중시 안 하는 스타일

투자할 때 이슈 만들어 효과 극대화
한국선 “내 이름 쓰려면 돈 내라”
이해득실 걸리면 철저히 현실주의
한·일 방어도 주고받기 대가 원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트럼프가 지향하는 대대적인 세금 감축과 금융·환경 규제 철폐는 신자유주의의 원류인 고전경제학의 사조를 따른다. 시장 원리에 맡겨야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가계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다.

그런데 한편으론 정부가 주도해 무려 1조 달러(약 1150조원)를 인프라 공사에 투자하겠다고 했다. 트럼프는 인프라 투자를 통해 “루스벨트 정부의 뉴딜정책 이래 가장 큰 경제 붐을 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는 고전경제학의 자유주의에 반하는 전형적인 케인시안적 입장이다. 우파 포퓰리즘에 가까운 이민 규제를 비롯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폐지, 자유무역협정(FTA) 재검토 같은 보호무역 역시 인력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주장하는 공화당의 자유주의적 기조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노믹스를 두고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는다. 한쪽에선 감세와 규제 철폐에 주목해 신자유주의의 상징인 ‘레이거노믹스’로 풀이하는 반면 다른 쪽에선 정부의 강력한 투자에 의미를 두고 큰 정부의 상징인 ‘케인시안의 시대’라고 설명한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트럼프의 경제정책이 외부에선 오락가락해 보이지만 미국인이 볼 때 경기부양용으로 그렇게 나쁜 정책이 아니다” 고 평가했다.

트럼프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의 과거 경영 스타일에 단초가 있다. 성공한 경영자 트럼프는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1971년 가업을 물려받은 후 ‘이슈 메이킹(화제몰이)’으로 투자자들의 이목을 끄는 전략을 적극 써왔다. 금빛 치장과 실내 인공 폭포가 화제를 모으면서 뉴욕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한 ‘트럼프타워’가 대표적이다.

트럼프는 9년 전 국내 한 언론 인터뷰에서 “투자했을 때 주위에서 화제가 돼야 한다. 그러려면 누군가가 ‘왜 거기 투자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는 “투기꾼들은 땅값이 얼마나 오를지만 생각하지만 땅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지 계속 고민하는 게 바람직한 투자”라고 말했다. 부동산 가치를 올리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 이슈 메이킹이었다. 그가 이번 대선에서 내뱉은 고강도 발언들도 ‘철저히 계산된, 연출된 설정’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자신을 투자처로, 유권자를 투자자로 가정했을 때 이민자 비하 등의 거친 발언으로 화제를 모을수록 기성 정치권이 강조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환멸감을 느낀 유권자를 결집시켜 ‘땅값(당선 확률)’이 오른다고 봤다는 것이다.

이장균 현대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에 비해 ‘선택과 집중’을 잘했다. 지난 8년간 버락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의 정책들로부터 소외됐다고 느낀 ‘앵그리 화이트(백인 노동자)’ 계층의 심리를 잘 파고들었다”면서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과 함께 이들 입맛에 맞는 내용 위주로 공약을 내세운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언론을 적극 활용했다. 이춘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의 본질은 거래에 능한 자본주의자”라며 “언론이 트럼프를 조롱했다고 하지만 실은 트럼프가 거꾸로 언론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했다.

앞서 트럼프는 87년에 출간된 회고록 『거래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론은 소재가 좋을수록 대서특필하게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다. 나는 일을 조금 색다르게 처리하고 논쟁이 생기는 걸 두려워하지 않은 덕분에 젊어서부터 사업에 두각을 나타냈다. 언론이 나를 다루지 못해 안달이 났다….’ 2004년부터는 NBC의 리얼리티쇼 ‘어프렌티스’ 진행을 맡으면서 전국적 화제의 중심에 섰다.

‘거래의 기술자’ 트럼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대가(代價)’다. “미국은 가장 부유한 국가인 일본을 방어해 주는 대가로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조롱을 받고 있다”(87년 뉴욕타임스 기고), “전쟁 승리의 대가로 이라크에서 유전을 인수해야 하고 한국에 대해서는 보호의 대가를 요구해야 한다”(2011년 4월 지지자 모임에서) 같은 발언이 자주 나오는 배경이다. 심지어 방한 중에도 ‘대가’를 주장했다. 부동산투자 전문업체 글로스타의 김수경 사장은 2007년 종로 센터원빌딩 투자를 위해 트럼프를 만난 인연이 있다. 김 사장은 “자신의 이름을 쓰려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며 과도한 지분을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고 기억했다.

마커스 놀런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수석 부소장은 10일 세계경제연구원 조찬 강연에서 트럼프 당선인에 대해 “트럼프는 모든 문제를 거래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라며 “전 세계를 상대로 거래를 하며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트럼프는 후보 시절 김정은을 죽이면 북핵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니냐는 말을 할 정도로 과격한 정책을 펼칠 수 있지만 반대로 김정은과 햄버거를 나눠 먹으며 거래를 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트럼프는 미국의 전통 엘리트 정치인들과 달리 자신의 말을 바꾸는 것에 부담을 느끼거나 정치적 신념과 신의를 중시하는 타입이 아니다”며 “유능한 사업가답게 현실(의회)과 타협해 넣을 공약은 넣고 뺄 공약은 빼는 거래(deal)를 잘할 것이기 때문에 트럼프 정부를 ‘변칙복서’ 상대하듯 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치적 성향만 해도 트럼프는 편의에 따라 소속을 바꾸는 모습을 보여왔다. 공화당(87~99년) 당적을 가졌다가 개혁당(99~2001년), 민주당(2001~2009년)을 거쳐 2009년 공화당으로 돌아왔으나 이후 탈당했고 2012년에 다시 공화당에 입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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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경제학과 교수)은 “트럼프의 모든 정책은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것”이라며 “굳이 경제 기조를 표현한다면 ‘미국 국익 우선주의’”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 의회는 상·하원을 모두 공화당이 장악했다. 의회의 행정부 견제가 강한 미국 정치 특성상 향후 트럼프의 경제 정책도 공화당의 기조와 타협해 ‘현실화’할 것이란 의견이 많다. 이장균 위원은 “대통령 후보자로서의 트럼프와 당선자 트럼프는 입장이 다를 것”이라면서 한·미 FTA 재협상과 같은 비현실적 공약을 지키려 들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그는 “오락가락 혼재된 경제 기조 속에서도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라는 큰 기조는 같을 것으로 예상돼 한국 정부가 이에 맞게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거래에 능한 ‘변칙복서’ 트럼프, 그의 현실주의와 포퓰리즘 정책의 스텝이 꼬일 때마다 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이 꿈틀댈 것 같다.

이소아·이창균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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