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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추사가 풍류 즐긴 계곡…여기는 종로구랍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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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악산 백사실계곡 산책길

부암동 백사실계곡에 가을이 들었다. 지난 여름 개구리ㆍ가재가 놀던 계곡물에 지금은 낙엽이 흐른다.

부암동 백사실계곡에 가을이 들었다. 지난 여름 개구리ㆍ가재가 놀던 계곡물에 지금은 낙엽이 흐른다.

계곡물 길어다 밥 짓는 두메 산골, 도롱뇽·가재·버들치·꺽지가 사는 깊은 계곡이 서울 안에 있다. 북악산 자락 종로구 부암동의 백사실계곡이다. 서울에서 가장 청정한 지역이라는 백사실계곡에도 단풍이 들었다. 월동에 들어간 도롱뇽과 가재는 못 봤지만, 대신 계곡에는 알록달록한 단풍이 있었다. 계곡물에는 단풍잎이 고이고, 오솔길에는 은행잎이 깔려 있었다. 2㎞ 남짓한 백사실계곡 산책길을 걸었다. 계곡 안에 머무를 때는 서울에 있다는 걸 깜빡 잊어버렸다.

비밀의 계곡
걷기 좋은 단풍 숲길을 품은 백사실계곡.

걷기 좋은 단풍 숲길을 품은 백사실계곡.

북악산(342m)과 인왕산(340m) 사이에 자리한 부암동은 옛 서울의 운치가 그대로 남아있는 동네다. 지금도 산비탈 굽이굽이에 골목집이 모여 마을을 이룬다. 청와대와 인접해 있어 군사보호구역도 많고 개발제한구역도 많다. 큰 건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숲과 계곡이 흔하다. 백사실계곡은 그 부암동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 뒤편에 조용히 틀어박혀 있다.

백사실계곡이 세상에 알려진 건 불과 10년 전 일이다.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38년간 출입이 막혀있던 계곡을 2006년 일반에 공개했다. 맑은 개울에만 산다는 도롱뇽과 가재가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직무정지 상태였을 때 산책을 나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백사실계곡은 금세 유명해졌다.

계곡에도 성수기가 있다면, 백사실계곡의 한철은 봄과 여름일 테다. 봄은 무당개구리를 비롯해 만물이 깨어나는 계절이고, 여름은 도심 가까이에서 더위를 피해 숨어들기에 좋은 계절이다. 백사실계곡의 가을 풍경이 궁금했다. 맑고 서늘한 장소를 좋아하는 도롱뇽이 사는 계곡이라면, 단풍 역시 고울 게 분명했다.

창의문(자하문)을 기점으로 백사실계곡을 향했다. 부암동 명물 ‘자하손만두’를 지나 ‘동양방아간’을 끼고 오른쪽 오르막길로 접어들었다. 가파른 오르막길이 1㎞ 가량 이어졌다. 한가로운 빌라촌과 카페를 지났지만, 땀이 나기 시작했다. 동행한 최정남(58) 해설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백사실계곡은 명성에 비하면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언덕 쪽에 차를 댈 곳이 마땅치 않으니, 대부분 이렇게 땀을 흘리며 걸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 수고로움 때문에 백사실계곡이 지금까지 깨끗할 수 있었던 거죠.”

부암동 언덕바지의 전망 카페를 지나 군부대 초소 앞에 다다르자 계곡으로 드는 내리막길이 나왔다. 백사실계곡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길 표지판보다 빨간 글씨로 적힌 ‘멧돼지 출현, 산행 주의 알림’이란 경고문이 먼저 들어왔다. 최정남 해설사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요. 멧돼지도 삽니다. 그게 백사실계곡입니다.”

계곡물에 빠진 단풍
은행나무 잎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은행나무 잎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

백사실계곡은 두메였다. 계곡길 초입의 뒷골마을은 강원도 산골마을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방금 스쳐간 고급 빌라와 카페가 무색하게, 산비탈을 따라 듬성듬성 낡은 집이 보였다. 뒷골마을(능금마을)에는 15채 정도 살림집이 남아 있었다.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약수터와 개울을 오가며 밥을 짓고 밭을 일구는 집도 허다하다고 했다. 군사지역으로 묶여 있던 시절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은 터줏대감 집이 대부분이었다. 주민을 방해할까 싶어 서둘러 계곡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백사실계곡은 약 13만㎡(4만 평) 면적의 작은 숲이었다. 그러나 깊은 숲이었다. 후미진 오솔길이 있는가 하면, 도토리나무가 우거진 깊은 골짜기도 있었다. 300년 수령의 소나무가 당당히 서 있었고, 은행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샛노란 색을 자랑했다.

오전에 쏟아졌던 비로 계곡물은 힘이 넘쳤고, 물먹은 낙엽이 쌓인 길에선 발이 푹푹 빠졌다. 언제부터 쌓였는지 계곡물엔 울긋불긋한 낙엽이 수면을 채우고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다 산천어와 송사리를 발견했다. 최 해설사가 “백사실계곡에서 비는 방해꾼이 아니라 복덩이”라고 말했다. “곧 가물 것 같더니, 비가 살렸네. 오랜만에 물소리 한 번 시원하다.”

추사 김정희가 머물렀던 백사실계곡 별서 터.

추사 김정희가 머물렀던 백사실계곡 별서 터.

백사실계곡 안쪽, 느티나무 우거진 틈에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별서(일종의 별장)가 터로 남아 있었다. 연못과 사랑채의 석축과 돌계단 등이 온전했다. 원래는 백사 이항복(1556~1618)의 별서라는 주장이 있었다. 백사실(白沙室)이라는 이름도 이항복의 호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2012년 추사가 별서를 사들인 기록이 확인되면서 지금은 추사의 별서로 불린다.

연못은 풀이 무성하고 사랑채는 석축만 남았을 뿐이지만, 옛날 별장의 운치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별서 터를 감싼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알록달록 빛났다. 별서 터 위쪽의 터진 자리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었다. ‘백석’은 백악산(북악산의 다른 이름), ‘동천’은 경치 좋은 곳을 의미한다.

한양도성길 북악산 코스에서 내려다본 부암동 일대.

한양도성길 북악산 코스에서 내려다본 부암동 일대.

백사실계곡 산책길의 유일한 단점은 너무 짧다는 것이다. 창의문으로 돌아와서도 체력이 남아 한양도성길 북악산 코스를 올랐다.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깎아지른 경사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도성길이 이어졌다. 도성길을 걷는 내내 왼쪽으로 부암동 일대와 단풍으로 물든 북한산이, 오른쪽으로 N서울타워가 따라다녔다. 산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백사실계곡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백사실계곡은 온전히 계곡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비밀의 계곡이었다.

백사실계곡 산책길 정보

걷기여행 포털이 평가한 백사실계곡 산책길의 난이도는 ‘중(中)’이다. 약 2㎞ 길이의 짧은 코스지만 입구까지 다다르려면 부암동 언덕길을 걸어 올라야 한다. 길머리는 창의문으로 잡는 것이 수월하다. 백사실계곡이 20분 거리로 멀지 않고, 돌아나오는 길에 한양도성길 북악산 코스(창의문~숙정문)도 도전할 수 있다. 7012 · 7022 · 1020번 버스를 타고 윤동주문학관 정류장에서 내리면 창의문 앞이다. 오는 30일까지 백사실계곡 무료 자연생태체험교실을 연다. 종로구청 공원녹지과 02-2148-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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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백종현 기자 jam1979@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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