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폭설 정미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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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여인-원래 그렇게 바보같은 년이에요. 밭일도 없는 늦가을, 조개 따러 다닌 잠시동안에 퍼진 그 우스운 소문에, 불맞은 멧돼지처럼 날뛰며 다리를 분질러버리겠다고 날뛸 때도 그저 내 억장만 무너졌지, 아니란 말 한마디 못했던 년이에요. 두 눈뜨고 제서방 훌쩍 가는걸 보고도 옷 섶 한번 못잡아당긴 년이에요.
사내-아내가 어디론가 떠났으리라고 했소. 역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있는 웅덩이 하나, 큰돌 하나까지 죄 얘기해 주었소. 부엌에 불이 잘 안들 때에는 뒷문을 반쯤만 열어주라는 얘기까지…아마 빈집일거라고…예서 살라고 했소.
여인-(창가로 다가서서 밖을 내다본다.) 이제 기차도 끊겼어요.
사내-그의 죄가 무섭소?
여인-아니오.다만 우리가 마음 속으로 저지르곤 하는 것을 그는 실제로 해버렸을 뿐이에요. 나는 알아요.……제가 사랑했던 게 그의그런 면인걸요.
사내-그를 사랑했소? 그는 아내를 업어온 그날 밤 이후 내내 아내가 자기를 미워했을거라 믿고 있었소.
여인-그래요. 그를 사랑했어요. (꿈꾸는 듯한 얼굴.) 진눈깨비에요…그렇게 춥진 않군요.…아무리 노망이 들었다곤 하지만 어머니와 같이 있으면서 잠자리를 같이 할 수있나요? (입을 가리고 웃는다.) 봄내 밤나무에 거름을 할 때나, 가을이 되어 정신없이 밤을 딸때는 그냥 나어린 오누이들처럼 그렇게 지냈지요. (창틀에 기댄 팔목에 얼굴을 비빈다. 그리움을 타는 얼굴.) 같이 무거운 거름을 내고 정신없이 밤을 따는 그런 생활은 껴안는다거나 같이 자는 것보다 더 우리를 가깝게 해주었어요.
사내-(모자를 고쳐쓰며 일어선다.) 가야겠소.
여인-밤이 늦었어요. 방향을 알만한 불도 없는 걸요.
사내-흐흐! 이십여년을 예서 살았고. 눈감고라도 못가겠소?
여인-나머지 날들은 좀 편하게 사셔야지요.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데.
사내-늘 미래만이 중요한 건 아니오. 눈에 보이는 것. 내 손에 쥐어지는 삶. 그건 별 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렸소.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소. 새로운 도시도. 새로이 만날 사람도. 새로운 꿈도. 그저 어제의 그곳. 그 인간들 .
오랜 느낌의 시간.
두사람 마주 바라보고 선다.
사내. 잊었던 듯 웃도리 안주머니에서 종이뭉치 하나를 꺼내 여인에게 건넨다. 여인,조심스레 종이를 풀어 무언가를 꺼내 유심히 살피나 모르겠다는 얼굴.
사내-그 친구, 원래는 아주 곱게 마름질된 심장을 만들려 했소. 식사에서 쌀만 골라내 씹어서 만든거요. 처음엔 그래도 제법 하트모양이었는데….흐흐! 마르는 동안 그렇게되고 말았소. (여인의 손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그러나 이건 마치 뒤틀려진듯한 심장이군. 그는 혹시,라고 말했소. 혹시 내아내가 있거든. ……그러나 나는 그의 표정에서, 내 아내는 벌써 어디론가 가버렸을 거에요라던 그의 말은 실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어떤 믿음을 배반하고 나온 말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지요.
여인-그래요. 알아보겠어요. 하트 모양인줄 알아보겠어요. 정말이에요.
사내-(기침하듯 쿡 웃는다.) 책 속의 율법은 지선이었는데, 이곳에선 이미 악마보다 더 가혹하구나. (여인을 향해)이제 올 사람도 없는데, 같이 가겠소?
여인-(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
사내-이젠 당신의 남은 세월을 지탱시켜줄 아무 것도 남지 않았소. 원하는 어디로든 데려다주겠소.
여인-눈이 쌓이면, 겨우내 눈이 녹길 기다리고, 봄이 오면, .어서 눈이 와,다시 갇히기를 기다리며 살지요.
(서서히 창가로 다가가 창을 닫는다.)
역에서 조금만 걸어내려가면 바다가 있어요. 내리는 눈을 소리도 없이 삼키는 바다가…….
서서히 어두워지는 무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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