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가 먼저다 2부] 3. 브라질의 몸부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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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10일 오후 브라질 최대 도시인 상파울루의 한복판 킹시지 노벤브로 거리. 손뼉을 치며 손님을 부르는 노점상들의 모습이 일견 남대문시장과 닮았다. 도로 곳곳엔 한 무더기씩 사람들이 몰려 서 있다. 머리를 디밀고 보니 자신의 노래를 담은 CD를 파는 거리의 가수들이다.

"정치인이 바뀌어도 우리의 삶은 달라지지 않네. 행복은커녕 고통만 늘어가네. 엄마는 돈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아이는 그 옆에서 울고 있네."이들이 부르는 노랫말엔 오랜 '남미병'에 찌든 브라질인들의 애환이 그대로 담겨 있다. 외환위기는 경제회생의 고비마다 찾아왔고, 그래서 여전히 생활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곳 사람들에게 노래와 춤은 척박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위안일 듯싶다.

*** "세계 돌며 경제 세일즈"

지난해 10월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골수 노동운동가 출신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실바(약칭 룰라)는 브라질인들의 '체념'을 '희망'으로 바꾸고 싶어한다. 전체 인구 1억7천5백만명 가운데 빈곤층이 3분의 1 가까운 5천만명에 이른다. 1달러 미만의 돈으로 하루 삶을 때우는 극빈자만 5백만명이다.

당선 직후 룰라 대통령이 내놓은 첫째 화두는 굶주림 퇴치였다. 그의 지지기반인 노동자와 농민들은 큰 기대 속에 일상화된 시위를 자제했고, 해외에서는 '좌파 성향 대통령이 별 수 있겠느냐'는 반응도 나왔다.

그러나 조세 딜세우 비서실장을 비롯한 룰라의 핵심 참모들은 "그가 선언한 '빈곤 제로 정책'의 핵심은 분배가 아니라 성장"이라고 강조한다. 배고픔이 없는 세상을 위해서는 있지도 않은 파이를 서로 나눠 가지겠다고 다툴 게 아니라 나눠 먹을 '파이'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룰라 대통령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 초 취임 이후 룰라가 보여준 행보는 나라 안팎의 예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상파울루 증권거래소의 이코노미스트인 서지오 루이스 드 케키라 실바는 "국민의 고통이 심해진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고금리 정책을 쓴 것도 이런 정책방향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가안정 없이는 어떤 성장도 의미가 없고, 국민의 삶의 질은 더욱 후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앞선 정부의 실패에서 수없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에 재정이 거덜나고 인플레가 치솟는 남미병을 또다시 앓을 수는 없다는 각오다. 룰라 정부가 재정적자를 키우는 주범으로 공무원연금과 방만한 세제(稅制)를 지목하고 이를 개혁정책의 핵심 과제로 선정한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1980년대 초 사회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노동자당(PT)을 만들었던 룰라는 요즘 시장원리를 강조하기에 바쁘다. 지난 8일 오전 상파울루 시내 우니키호텔에선 브라질의 대표적인 수출품 가운데 하나인 가죽제품 전시회가 열렸다. 피혁업계 경영자들은 룰라의 개막식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환율절하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기업인들은 최근 자국 화폐인 헤알화의 가치가 가파르게 올라가 수출경쟁력을 잃고 있다며 정부에 외환시장 개입을 요구해 오고 있었다. 룰라는 그러나 "정부의 시장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개입이 지난 6개월간 애써 관리해온 국가신용도를 갉아먹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그는 다른 식으로 기업인들을 달랬다. "나는 앞으로 전 세계를 돌면서 브라질 제품의 선전자가 되겠다."그는 연설을 마치고 곧바로 포르투갈.영국.스페인 등 유럽국가 순방길에 올랐다. 룰라는 연말의 아프리카 방문계획을 짜고 있고, 내년엔 중국.인도.러시아 등 거대 시장을 겨냥한 세일즈 외교에 나설 예정이다.

상파울루주 기업연합의 크리스천 로바우어 국제담당 부장은 "야당 시절의 룰라는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주 전 대통령이 일은 하지 않고 해외여행으로 소일한다고 공격하기도 했지만 지금 그는 카르도주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 국내외 높은 지지가 희망

시장을 존중하고 연금개혁 등을 추진하는 그의 정책방향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국내에선 70% 안팎의 높은 인기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또 해외에선 브라질 국채를 매입하려는 열기로 나타나고 있다.

룰라 정부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13%에 이르는 실업률을 낮추는 일이다. 일자리 창출이야말로 그가 내건 빈곤퇴치 정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은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지난 20일 브라질 최대의 자동차공장인 폴크스바겐 현지공장은 4천명 감원계획을 발표했다. 실제로 실업률은 그가 집권한 후 더 높아졌다.

주가와 헤알화 가치는 많이 안정됐지만 시민들은 대부분 "무엇이 나아졌는지 아직은 모르겠다"는 대답들이다. 한동안 농장 무단점거 시위를 자제해 오던 '토지없는농민운동(MST)'회원들은 이렇다 할 대책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난 봄부터 투쟁을 재개했다. 기득권층인 공무원들은 여전히 연금개혁에 반대 목청을 높이고 있다.

전직 신문기자인 안드레아 코디올리는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 큰 나라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달라지겠는가.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믿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

상파울루.산토스=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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