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삼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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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러시아의 유명한 무정부주의 「표트르·크로포트킨」의 자숙부 『혁명가의 추억』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비사가 실려 있다.
개척자 「무라비요프」가 이곳을 처음 개척했을 때는 정부의 도움이 아무 것도 없었다.
도움은커녕 그가 연해주 지역을 점거하여 러시아 영토에 병합하는데 대해 정부 내에서 찬성, 동조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육군성은 점거할 인원이 없다고 했고, 재무성은 비용이 없다고 했고, 외무성은 외교분쟁의 여지가 있다고 극구 반대했다.
그 때문에 「무라비요프」는 순전히 자기 혼자 책임을 지고, 재빨리 극동확보사업을 추진했다.
거기에 동원된 사람들은 형기를 마친 제실 광산의 농노였다.
1857년에는 러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온 농업 이민 1만 명이 있었고, 정치범의 이주도 따랐다.
하지만 그 땅은 워낙 넓어서 자국민 만으론 개척이 불가능했다.
한국 이민이 그곳을 찾은 것은 생활난 때문이었다. 1869년 북한지방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이민은 촉진되었다.
그때 러시아는 한인 이민에게 영구히 인두세를 면제하고 20년간 지세도 면제했다.
그 때문에 한인 이민은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우리 정부가 엄격히 이민을 국법으로 막고 효수형으로 시위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간 사람들이 1905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민회를 조직하고 신한촌에 학교까지 세웠다.
해조신문을 통해 민족독립사상도 고취했다. 그곳은 바로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원래 만주사람들의 어촌이었다. 그 이름은 해삼위였다.
그러나 1856년 영국배가 들어온 후 곧 러시아 군함 만주르가 점령했다. 러시아에 정식으로 합병된 것은 1860년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어의가 바로 「동방을 영유하라」는 것이다.
그곳이 태평양으로 향한 러시아의 현관이 된 것은 당연하다. 위치뿐 아니라 천연의 양항다운 조건을 두루 갖췄다.
수심이 깊어 5천t급의 배 60척이 한꺼번에 정박할 수 있다. 겨울에 한류 때문에 결빙되지만 쇄빙선으로 얼음을 깨고 연중 사용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지금 소련 극동함대의 거점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지난 8월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으로 극동지역의 균형적 발전정책을 확인했다.
그동안 군사상 이유로 엄격히 제한했던 개방도 내년 5월에는 이루어진다.
소련의 「동방을 영유」하는 정책의 실체가 점점 드러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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