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인의 작가전] 환상 편의점 #10. 마음 이어폰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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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한 사내를 보면서 이어폰을 낀 여린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어폰에서는 마음의 소리는커녕, 잡음 하나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다행히 돈을 내진 않았지만,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그런 유치한 거짓말에 속다니.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가 이어폰을 빼려 할 때였다. 고개 숙인 채 뭔가 중얼거리며 걸어오던 취객과 그녀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 순간.

‘어?’

이어폰에서 희미한 소음이 울렸다. 여린은 얼른 다시 이어폰을 고쳐 꼈다. 그러자 소리가 좀 더 명확해졌다. 그것은, 작은 음악 같았다. 사람의 말처럼 적확한 뜻을 가진 소리는 아니었으나 희한하게도 그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심장박동 같으면서도 불규칙한 리듬, 아주 조금씩 커지는 불쾌한 소리, 거친 호흡 같은 배경음악. 바로, 욕망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취객은 겉으로는 전혀 그런 표를 내지 않았다. 그저 힐끗거리면서 여린을 가볍게 훑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어폰에서 들리는 욕망의 소리는 점점 커졌다. 편의점 남자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 그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으면, 정면으로 마주 보며 대화를 시작한 사람의 마음속 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그게 기본 기능입니다.

어쩔까. 여린은 잠깐 갈등했다. 아직 취객과의 거리는 제법 되었고 그의 걸음은 느렸다.

- 도중에 귀에 꽂는 타원형 부분을 한 번 두드리면 좀 더 깊고 자세한 마음이 들리게 됩니다. 두드릴 때마다 점점 더, 깊숙한 내면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게 되고요.

이게 단순한 이명이나 소음인지, 혹은 잘못된 전파의 혼선 같은 것인지 여린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 여차하면 달아나버리지 뭐.’

그녀는 편의점의 남자가 일러준 대로, 양손을 올려 귀에 낀 이어폰의 표면을 검지로 가볍게 톡, 두드렸다. 그러자 곧장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걸걸하고 굵직한, 40대 중년 남자의 음성 같았다.

< 그런데 저년은 왜 저기 계속 저러고 서 있어? 역시 몸매는 죽이네.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

거기까지 들은 여린이 움찔했다. 취객은 비틀거리면서도 정확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한 번 슬쩍 주물러나 볼까? 가만, 그러고 보니 골목 안에 CCTV도 없잖아? >

여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다가,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직후, 누가 잡아먹나, 왜 도망치고 지랄이야 – 어쩌고 하는 취한 남자의 웅얼대는 목소리가 이어폰 밖에서 들려왔다.

그 뒤로도 여린은 한참이나 더 달렸다. 그러다 집 근처까지 와서야 겨우 멈춰 섰다. 금세라도 얼굴이 불콰해진 취객이 달려들 것만 같았다.
숨이 턱에 닿아 현관문을 열자, 낯익은 신발이 보였다. 엄마였다. 평소라면 짜증부터 났겠지만, 이 순간은 그렇게 안심될 수가 없었다.

“엄마아!”

“먹고 나면 바로 설거지하라고 했는데, 이게 뭐니?”

여린은 싱크대에서 설거지하고 있는 엄마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그 잔소리조차 마음이 놓였다.

“얘가 왜 이래?”

엄마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반찬이 떨어지려면 멀었다. 아무래도 며칠 전에 말다툼했던 일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찾아온 듯했다.

‘어? 그러고 보니, 엄마의 생각은 들리질 않네.’
의아해하던 여린은 곧 이유를 깨달았다. 취객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다 정면으로 마주서서 눈이 마주치자, 비로소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정면으로 마주 본 사람의 소리를 들려준다고 했었지.’

그때, 설거지를 마친 엄마가 고무장갑을 벗고 돌아서려 했다.

“여린아, 저번에는 엄마가…….”

“엄마, 잠깐만!”

“응?”

여린은 덜컥 겁이 났다. 만약, 정면으로 마주 보게 됐는데 엄마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쩌지?
말로 뱉은 건, 본심이 아니었을 거라는 자기 위안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을 직접 들어버리면 그럴 수도 없었다. 여린은 엄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익숙하고 포근한 엄마의 냄새가 났다. 흐릿한 집 된장 냄새와 언제부터인지 한 가지 상표만 고집하는 엄마의 화장품 냄새, 부모님이 사시는 집 냄새 같은 것들이 뒤섞인 냄새였다. 그래, 엄마가 마음속으로 나한테 나쁜 말을 할 리가 없어. 내 엄마잖아.

“무슨 일 있어?”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여린은 포옹을 풀고 엄마를 돌아보게 했다.

“아냐, 엄마. 그냥, 엄마 냄새 맡고 싶어서.”

엄마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이번에는 이어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너무도 분명한 엄마의 목소리였다.

< 걱정이네. 얘가 진짜 무슨 일이 있나? >

엄마는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여린아. 저번에 엄마가 멋대로 네 방을 뒤지고 한 건 미안해. 그런데 진짜로 뭘 찾으려고 들쑤신 게 아니라, 청소해주려고 그런 거였어. 먼지가 뽀얗게 앉아서……. 방바닥 청소는 청소기 미는 것 같은데, 화장대 위나 책상, 그런 데까지는 제대로 못 치웠더라고. 못 봤음 모를까, 봤더니 답답해서. 네가 그 먼지를 다 들이마실 거 아냐. 엄마 성격 알잖아.”

“응, 알았어. 나도 미안해.”

여린은 살짝 웃으며 답했다. 역시, 엄마의 생각은 그녀가 하는 말과 거의 일치했다. 마음이 놓이고 기분이 편해졌다. 누군가의 생각을 몰라서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음의 평화였다.
순간, 한 가지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어폰의 볼륨을 높여서, 더 깊은 마음속 생각, 엄마 스스로도 모르는 무의식을 듣는다면?’

여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인간의 자의로 통제되는 생각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정한 본심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엄마가 한 말이 아니었다면, 이어폰 표면을 두드려 볼륨을 높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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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건 좀 벗어, 얘. 요즘 애들, 시도 때도 없이 이어폰 끼고 다녀서 큰일이야. 음악 듣는 거야 좋다만, 그러다 뒤에서 누가 다가와도 모른다고 하더라. 계속 끼고 있으면 청력에도 나쁘고.”

“어휴, 또 잔소리 시작이시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여린은 순순히 이어폰을 빼들었다. 그리고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 안쪽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물었다.

“웬일이니? 책상 위에다 내던질 줄 알았더니. 비싼 물건인 모양이네?”
여린은 혹시나 엄마가 껴보겠다고 할까봐 얼른 대꾸했다.

“응, 비싼 거야.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잘못 만지면 고장 나서 큰일 나.”

“하라고 줘도 안 해. 엄마 귀 많이 나빠진 거 몰라? 이어폰이 아니라 곧 보청기를 껴야 할 판이다, 이것아.”

엄마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리고 설거지를 끝내기 무섭게, 주섬주섬 저녁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저녁 안 먹었지?”

“응, 배고파! 엄마, 같이 먹고 갈 거지?”

“그래야지.”

“자고 갈 거야?”

“그럴까?”

엄마는 늘 날이 서 있던 딸이 모처럼 살갑게 굴자 싫지 않은 듯했다. 모녀는 함께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떨고, 원룸 방 안에 이부자리 하나를 펴고 나란히 누워서 잠들었다. 몇 번 뒤척이던 여린이 일어나 앉은 때는 몇 시간 후였다.

‘잠들어 있을 때는, 진짜 솔직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자꾸 이 생각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여린은 살며시 일어서서 책상 서랍을 열고 이어폰을 귀에 꼈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서 잠든 엄마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방은 창문이 작은 데다, 커튼까지 쳐놓아서 한밤중이 되자 칠흑같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그냥 정면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시선이 마주쳐야 하는 건가.’

여린은 안도 반, 아쉬움 반의 심정으로 이어폰을 빼려 했다. 엄마의 목소리가 얼핏 들린 건 그때였다. 그녀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 역시, 정상이 아니야. >

엄마는 잠든 게 아니었다. 아니, 좀 전까지는 잤겠지만 그녀가 일어서는 서슬에 깨어난 것일 테다. 그리고 숨죽인 채 그녀가 뭘 하나 살핀 모양이었다. 그러다 어둠 속에서 모녀의 시선이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홍채에 받아들일 빛이 너무 적어서 정확히 볼 순 없었지만, 분명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던 게다.

< 에구머니, 저게 뭐하는 거야? 왜 저렇게 일어서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어? 무서워라, 내 딸이지만 너무 섬뜩하네. 얼마 전부터 히스테리도 심해지고. 진짜 정신병원에라도 데려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

녹아서 노근노골 해졌던 마음이 다시 차게 굳었다. 그래, 이 상황이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건, 머리로는 이해가 갔다. 그래도 정신병자 취급을 하는 건 참기 어려웠다. 여린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

“엄마 안 자는 거 다 알아.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난 그냥, 뭐 좀 찾으려다가 다시 가서 누워야 하는데 너무 캄캄하니까, 혹시 엄마를 밟을까 봐 보고 있었던 거야. 눈이 어둠에 익을 때까지.”

“그런데, 이어폰은 왜 꺼내서 꼈니?”

“뭐?”

“서랍 여는 소리 들었어. 거기에 아까 이어폰 넣어놨었잖아. 자다 일어나서 갑자기 그건 왜 꼈냐고.”

<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안 되면 사람을 불러서라도……. >

여린은 저도 모르게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면서 손도 함께 넣어 이어폰을 꽉 쥐었다. 이 이어폰이 생겨서 비로소, 그토록 두려워하면서도 궁금하던 사람들의 실체를 알게 됐다. 이건 누구한테도 못 줘. 그리고 정신병원에도 안 가. 난 그저, 남들이 모르는 걸 좀 더 알게 됐을 뿐이니까.

“그냥, 잠이 다시 안 들어서 음악 들으면서 자려고 그랬어. 엄마가 쓸데없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만하자. 그래, 다시 자자. 엄마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나 보다.”

모녀는 다시 나란히 누웠지만 둘 다 잠은 멀리 달아난 후였다. 여린은 희미하게 날이 밝자마자 일어나서 씻고 집을 나갔다. 새벽 다섯 시 반이었다. 엄마는 그런 딸을 붙잡지 않았다.

여린은 빠른 걸음으로 학교 근처로 향했다. 이제 새벽이면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대학가에는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카페나, 아예 24시간 운영하는 패스트푸드점이 있었다.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 그런 데서 시간을 때울 생각이었다.

‘꼭 생각을 들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

몇 주 전부터 여린에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하는 남자 선배가 있었다. 진석이라는 두 학번 위의 선배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거리를 두었다. 늘 그랬듯,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심스러워서였다. 앞에서는 좋아하는 것처럼 굴다가, 안 보이는 데서는 또 딴 소리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여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그 선배는 잘생겼고 키가 훤칠하게 컸으며 매너도 좋아 인기가 많았다. 굳이 여린과 사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린이 계속 빼기만 하다가 간혹 신경질까지 부리는데도, 진석은 꾸준했다. 한 번도 불쾌한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적당히 구애하면서도 부담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자 여린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교제해보기로 거의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스스로 정신과까지 고민한 이유이기도 했다. 이대로라면 정상적인 연애도 하기 어렵겠다는 위기감이 들어서였다. 이 이어폰으로 그의 마음을 들어볼 것이다. 그래서 마음 또한 한결같다면 두말할 것 없이 그를 택할 것이다.

‘그리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할 거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생각 따위 무시하고……. 단 한 사람만, 진심으로 나를 좋게 생각해준다면 그거로 족하니까.’

이어폰을 낀 채 멍하니 생각하던 여린의 시선이 패스트푸드점 점원과 마주쳤다. 점원은 반사적으로 생긋 웃으며 묵례해보였다. 여린 또래의 젊은 남자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무심코 마주 웃던 여린의 표정이 굳었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 아, 졸라 피곤한데 새벽부터 햄버거 처먹으러 오고 지랄이야, 저년은. 짱박혀서 좀 자려고 했더니……. 뭐하는 년인데 이 시간에 돌아다녀? 뻔하지. 어디서 남자랑 뒹굴고 왔나보지. 얼굴은 별론데 몸매는 괜찮네. >

여린은 벌떡 일어서서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병신 새끼, 지랄하고 있네. 피곤하면 때려치우든가.”

“……네?”

그녀는 어안이 벙벙해진 아르바이트생을 두고 돌아서서 패스트푸드점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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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소개  
    명지대학교 문예 창작학과 졸업
    단행본 <문답 무용>, <파이널 에볼루션> 출간
    <도전!웹 소설 쓰기>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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