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거」미 차관보 왜 왔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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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개스턴·시거」미 국무성 동아시아 및 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6일 밤 중공과 일본을 거쳐 내한, 그의 방한 시점과 목적 등을 놓고 정가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시거」차관보는 이날 김포공항에 도착, 한국 정부에서 잡아 놓은 귀빈실의 특실을 들르지 않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타버려 기다리던 보도진들을 따돌렸다.
그는 예정됐던 이날 하오 7시30분의 도착 시간보다 2시간이 늦은 9시40분에 도착했는데 그 동안 「시거」차관보를 마중 나왔던 한 외무부 당국자는 보도진들에게 『도착성명이나 기자 회견 등은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미국측의 생각』이라며 「시거」차관보가 보도진을 만나지 않고 숙소로 직행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시거」차관보는 7일 상오 노신영 국무 총리를 예방, 45분 동안 요담한데 이어 외무부로 오재희 차관과 최광수 장관을 차례로 만나고 8일에는 이재형 국회의장·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민우 신민당총재 등 여야 수뇌들을 두루 만난 뒤 이날 하오 이한 예정.
비교적 바쁜 일정 속에 국내 여러 인사들을 폭 넓게 만나고 있으나 재야 인사들은 이번 방한 중 면담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러졌다.
「시거」차관보의 방한을 놓고 정부 당국자는 오로지 관례적이고 의례적인 여행일 뿐이라는 태도.
「시거」차관보가 지난 3월 차관보로 취임한 뒤 담당 지역을 돌며 인사도 하고 현지사정도 익히는 「교육여행」겸 「자료 수집 여행」에 나선 것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그의 방한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것까지는 없다는 애기이며 『우리로 치면 국장급의 방한인데 너무 색다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부 외교 소식통을 비롯한 정가 주변에서는 그의 방한시기와 일정, 특히 그의 방한에 앞서 지난달 30일 미리 내한, 지난 4일까지 6일간 국내인사를 골고루 만나고 돌아간 뒤 다시 「시거」차관보와 함께 내한한 「월리엄·클라크」부차관보의 이례적인 동정을 주목하고 있다.
우선 방한 시점으로 볼 때 김경원 주미 대사의 돌연한 일시 귀국(지난달 22일)에 이어 이루어진데다가 「제임즈·릴리」신임 주한 미 대사가 오는 15일께 부임하는 것에 앞서 이루어지는 것이 주목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유성환 의원(신민)의 구속사건과 용공 좌경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 건국대 사태, 김대중씨의 불출마 선언 등 긴박한 분위기와 그의 방한을 연결시키는 시각도 있다.
「시거」차관보는 지난달 30일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시아 태평양 지역 공관장 회의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이 민주주의 증진을 위해 내정 간섭은 안 하겠지만 모든 민주세력과의 접촉은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정가 일부에서는 그의 이런 발언과 「클라크」의 사전 방한 동정 등을 연관시켜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각도 있다. 「시거」차관보는 이번 방한 중 재야 인사와의 접촉이 없으나 「클라크」부차관보는 「시거」차관보보다 훨씬 분주한 스케줄 속에서 대학교수·경제계인사·재야인사들을 두루 만나고 돌아갔었다.
「클라크」부차관보가 지난 4일 출국하기 직전 이민우 신민당 총재·김대중씨 등을 만나 비교적 장시간 요담했는데 특히 김대중씨와는 「던롭」주한 미 대사관 참사관실에서 오찬을 나누며 긴밀한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져 주목된다.
이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에 대해서는 김씨마저도 함구해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한 관계자는 『아마도 김씨로 하여금 자제를 하도록 요청하고 정부측과 협력을 당부하는 메시지를 전달했지 않겠느냐』면서 그렇지만 그같은 전달은 미국측의 지금까지의 일관된 입장임을 강조했다.
「시거」차관보는 7일 상오 시내 모처에서 한 정부고위 당국자와 조찬을 함께 하고 이어 상오 9시30분 정부 종합 청사로 노신영 국무총리를 예방, 약 45분간요담.
이 자리에는 미국측에서 국무성의 「클라크」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와 「다우닌」특별 기획 과장,「던롭」주한 미 대사관 참사관이 배석했고 우리측은 오재희 외무차관과 윤석정 총리 비서실장이 배석, 가급적 양측의 배석자를 줄이려는 눈치.
특히 평소 총리의 외빈 접견에 거의 모두 배석했던 정연춘공 보비서관마저 자리를 함께 하지 않아 요담내용에 대한 아무런 발표도 없었다. 이에 대해 총리실측은 예방시간도 짧고 의전적 성격이 강해 특별히 발표할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
그러나 총리실 관계자들은 이날 예방이 아무리 짧은 시간이지만 정치적 얘기가 없을리 없고 특히 김대중씨 불출마 선언과 금강산 댐 문제에 대해서 서로의 입장을 개진하지 않았느냐는 추측들.
민정당은 「시거」차관보 등의 방한이 그들의 지역 정세 판단 자료를 구하기 위한 목적일 것이라고 분석하는 경향.
대표위원의 한 측근은 『노태우 대표가 지금까지 방한한 미 고위인사들과 많이 만나봤지만 그들은 국내의 일반적 상황을 주로 묻는 형식을 취해왔다』면서 『8일 노 대표와 「시거」차관보의 면담도 지금 형편으로선 특별한 것이 예상되지 않는다』고 설명.
민정당 의원들은 『국내 정치 상황이 유동적인 만큼 미국의 대한 관심도 그 만큼 높을 것은 틀림없고 따라서 미국의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정세를 심도있게 파악하는 활동의 일환일 것』이라고 보면서 『야권에서 오가는 추측들은 대부분 근거가 없다』 고 주장.
그러나 일부 의원들은 최근의 반미 무드 및 개헌문자와 관련해 미국이 한편으로는 정부의 용공 척결을 지지하면서 타협무드 추진에도 관심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관측.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도 8일 하오 「시거」차관보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으며 이날 낮엔 미 대사관저에서 최형우·김수한 부총재도 「시거」차관보와 함께 국내 정세에 대해서 논의할 예정.
한편 신민당을 비롯, 야권에서는 이들의 방한 활동에 대해 미측의 동북아 전략과 관련, 한반도의 정치적 안정을 달성해야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 같다고 추측. 한 의원은 김대중씨의 불출마 선언, 김수환 추기경의 「무욕대화론」둥 범야권의 구체적 난국 타개안이 제시된 이 시점에서 한국의 국내사정을 원만하게 해결토록 중재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미측의 판단이섰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분석했다.
허경구 의원은 『미국이 우리의 정치에 무언가 유용한 역할을 할만한 시점에 와있다』면서 『그것이 공평한 중재자의 역할일 수도 있다』고 전망.
이밖에 다른 관계자는 『우리 정치 사회의 상황이 이해 당사자가 직접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감정적 처지에 있지 않다』면서 『따라서 미측이 모종의 정치적 대안을 들고 첨예한 대림을 벌이고 있는 여야를 설득하는 작업의 일환일수도 있다』고 관측. <고도원·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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