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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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창경궁과 종묘가 77년만에 옛 모습 그대로 하나의 궁궐이 된다.
돌이켜 보면 창경궁은 일본과의「악연」때문에 역사적으로 두 차례의 큰 비운을 겪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면서 수강 궁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이 궁궐은 1484년(성종 15년)에 증축, 창경궁이 되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첫 번째의 악연이다. 두 번째는 일제가 한국을 병탄 하기 직전인 1909년 유서 깊은 이 고궁을「원」으로 격하시키면서 동·식물원을 만들어 버렸다. 그리곤 도로를 뚫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창경궁과 종묘의 지맥을 끊어 두 동강이로 만들어 버렸다. 속셈은 한국인의 민족 정기를 약화시킨다는 그들 나름의 풍수설이 뒷받침하고 있음은 갈 알려진 사실이다.
작년에는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에 21개의 쇠막대기가 꽂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길이 40cm, 직경1·9 cm의 강철로 된 이 쇠막대기는 언제 누가 꽂아 놓았는지 확실치 않으나 특수장비를 동원하지 않고는 그런 작업을 할 수가 없다.
몇 년 전에는 계룡산에서도 이러한 쇠막대기가 발견되었다.
북한산이나 계룡산은 모두 명산중의 명산. 풍수설에 따르면 이곳은 모두 한반도의 혈이 통하는「명당」자리다.
물론 이 같은 소행이 일제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무슨 원심이 있기에 이런 명산에 쇠막대기를 박겠는가.
우리나라 문헌에서 풍수에 관한 기록은『삼국유사』의 탈해 왕 부분에 처음 등장한다. 공이 등극하기 전 호 공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의 택지를 발견하고 속임수를 써서 그 땀을 빼앗아 짐을 지음으로써 후에 왕이 되었다는 얘기다.
또 백제가 반월형의 부여를 도성으로 삼은 것도,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정한 것도 모두 풍수에 의한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성행한 풍수사상은 신라말기 도선과 같은 대가가 나와 중국의 참위설을 골자로 한 지리쇠왕 설, 산천순역 설, 비보 설 등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고려 때 간행된『도선 비기』등은 도선이 지은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왕실은 물론 일반 사가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고려 대사가 그의 자손을 경계한『훈요십조』가운데도 절을 세울 때는 반드시 산수의 순 역을 점쳐서 지덕을 잃지 말도록 훈계했다.
그러나『비기』라 일컫는 이 같은 예언서가 인심을 현혹한 일도 적지 않았다.
일제가 창경궁의 지맥을 끊은 것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뒤늦게나마 창경궁이 옛 악연을 모두 떨쳐 버리고 옛 모습을 되찾게 된 것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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