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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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인은 잘 우는 것일까. 남북 이산가족 찾기 캠페인을 할 때 몇 달을 두고 온 국민의 눈시울이 젖어 있었던 생각이 난다. 지난해 추석엔 평양방문단이 또 국민들을 울려주었다.
요즘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때마다 선수도 울고, 국민도 운다. 엊그제 탁구시합에서 중공 팀을 이기자 우리 선수는 아예 경기장 마룻바닥에 큰「대」자로 누워 통곡했다. 그 시간은 깊은 밤. 국민들도 밤잠을 잊고 눈물의 환호를 보냈다.
이번 대회에서 눈물을 보인 외국선수로는 일본의 체조선수가 있다. 중공선수에게 금메달을 잃고 돌아서서 눈시울을 닦았다. 패자의 눈물은 그 심정을 능히 헤아릴 수 있다.
물론 외국사람도 울 때는 운다. 또 약자가 아니라도 운다.「히틀러」는 나치당에 분파가 생겨「오토·슈트라세르」가 탈당하려하자 밤새도록 그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 전기작가 「존·갠더」의『행진』이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다.
1893년 어느날 저녁 뉴욕의 카네기 홀을 메운 미국사람들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모두들 손수건을 꺼내 눈물과 콧물을 닦았다. 그것은 패자의 눈물도, 승자의 눈물도 아닌 사람의 눈물이었다.
그날 저녁 보히미아 출신「드보르자크」의 교향곡『신세계』가 연주되자 미국에 이민 온 체코사람들은 북받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울음은「드보르자크」만큼이나 음악사에 남는 울음이 되었다.
그러나 울음은 눈물과 소리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소리 없는 울음도 있고, 마음의 울음도 있다.『울어서 나는 눈물 위로 솟지 말고/구회간장(구회간장)에 속으로 흘러들어/님 그려 다 타는 간장을 녹여볼까 하노라.』
조선왕조 때의 가인 박영수의 시조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인의 이런 눈물도 있다.
『눈물이 진주라면 흐르지 않게 두었다가/십년 후 오신 님을 구슬성에 앉히련만/흔적이 이미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이쯤 되면 울음도 아름답다.
우리 한국인은 예부터 농경문화의 터전 위에서 소탈하고 겸허하고 부드럽고 평화적인 성품을 갖고 살아왔다. 마음결이 여러 눈물이 많은 것일까.
그러나「W·블레이크」같은 시인은『눈물이 많으면 영원히 갓난아기가 된다』는 흉을 보았다.
우리 국민은 누가 보아도 그런 갓난아기는 아니다.5천년 역사를 단일민족과 단일문화로 지켜온 강인한 민족이라는 말은 괜한 자화자독이 아니다. 할수록 울음을 삼키는 절도도 있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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