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땅에 밭 일궈 채소 가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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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파트 노인들의 운동장이지요."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밭엘 나와 있으면, 시간가는 줄을 몰라요." "아이들의 자연공부 실습장이예요. 손자 아이들이 오면 밭에 데리고 나와 콩도 따고 고구마도 캐며 농사일을 가르칩니다."
강남구 대치동 우성아파트. 이 아파트의 10여명 노인들은 새벽 5시면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파트 경계에 쳐진 철조망 한옆의 출입구를 통해 한두명씩 밭으로 나간다.
탄천과 아파트사이의 개천 옆 자투리의 시유지땅에 밭을 고르고, 곡식과 야채를 심어 농사 짓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긴 마름모꼴에 4백여평은 실히 됨직한 이 땅에는 파. 호박. 무우. 근대등 야채류를 비롯하여 콩. 녹두. 땅콩. 깨. 동부등 다양한 종류들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있다.
"올봄에는 고추모를 3천원어치나 사다 심었는데 웬일인지 자꾸 죽어서 본전도 못찾았어요. 그러나 부추나 선비콩은 어찌나 실히 자라는지 큰딸 작은딸이 놀러오면 한보자기씩 싸보내면 엄마가 농사지은 것이라고 좋아해요"
어린시절 안성의 농가에서 자라 농사일이 훤하다는 이규월 할머니(70)의 얘기.
"이른 봄에는 딸기모를 사다 심어 꽤 많이 따먹었어요. 토마토도 재미를 봤고, 수박씨도 심었는데 그래도 두덩이나 따먹었어요. 손자들이 놀러오면 밭으로 데리고 나와 함께 콩도 따고 밭도 매는데 땀흘려 가꾸어 수확을 얻는 농부의 기쁨을 가르쳐 주는 현장실습이지요."
아파트옆 공지에 농사를 짓는 노인들 중에서는 자신이 가장 어리다(?)는 유숙자씨(55)의 얘기. 그는 또한 함께 밭엘 나갔던 손자가 밭을 "할머니의 농장"이라고 일기에 썼더라며 웃는다.
지금 이 아파트 노인들의 전용운동장인 아파트옆 공한지의 철조망 담에서는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강남콩도 여물어가고 있다. 땅콩도 밤콩도 깨도 수확을 앞두고 있다. 김장용 무. 배추도 나날이 속대가 올라오고 있다.
"웬일인지 우리 배추에는 자꾸 진딧물이 생겨요. 잡아주어도 자꾸 생기는데..." 송명희할머니(63)가 자문을 구한다. "약을 줘야지요. 말죽거리에 가면 진딧물약을 팔아요. 1천cc들이가 4천2백원이예요."
3년전 새아파트로 이사를 한후 제일 먼저 쓰레기와 흙. 돌더미로 가득한 공한지를 갈기 시작했다는 이예근할아버지(68)의 조언이다.
이들 노인들은 또한 그들이 가꾼 야채나 곡식은 아파트에서 깎아낸 잔디풀등으로 만든 두엄을 쓴, 화확비료를 쓰지 않은 청정야채나 곡식이라는 것이 자랑.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인기라는 것이다.
"자잘한 부식비를 절약할 뿐 아니라 자칫 활동량이 부족하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기 쉬운 노인들의 즐거운 소일거리이며 좋은 운동이 될 수 있어농사짓기는 권할만 합니다."는 것이 이예근씨의 얘기. 이미 아파트단지옆 빈땅은 그 동네 노인들에 의해 경작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여의도. 잠실. 목동. 가락동 등 아파트 단지에는 반드시 자투리 빈땅이 있으므로 서울시나 아파트 관리사무소측은 노인들이 이를 적극 활용토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고 노인들은 입을 모은다. <박금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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