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분위기 일신할 때다|성병욱<편집 부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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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4월30일「임기 내 개헌」다짐으로 상승세를 탔던 국민들의 사기가 얼마 전부터 다시 저조해지는 느낌이다.
특히 최근 잇단 몇 가지 일로『이래서 되겠느냐』『어떻게 되려고 이 모양이냐』는 걱정과 개탄의 소리가 자주 들린다.
국민의 사기를 떨 군데는 양담배수입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대한통상압력 같은 외부적 요소도 있지만, 역시 부천서 사건이라 불리는 성 고문 물의와 독립기념관 화재사건이 가장 큰 요인이다.
부천서 사건이야말로 국민의 심성을 황폐시키는 그야말로 악성사건이다. 피해자 측은 경찰이 여성피의자에 대해 성을 고문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것이고, 수사기관 쪽은 의식화된 여성피의자가 성마저 혁명의 도구로 쓴다는 주장이다. 피해자·변호사 및 각종재야인권단체의 주장과 검찰의 사건조사발표에는 이렇게 근본적인 사실인식과 시각의 차이가 있다.
어느 쪽 주장이 진실, 또는 진실에 가까운지를 권위 있게 단정할 처지는 아니다. 또 진실을 가리자고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평소 수사기관과 당사자들의 소행과 또는 관행에 비추어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수사현장을 본 것도 아니고 목격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 객관적인 사실인식이라기보다 주관적인 가치판단에 의해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검찰의 수사결과가 불행히도 국민일반의 의 념을 가시게 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수사결과발표 후에도 외설적 묘사를 담은 유인물이 각처에서 나돌고 있다. 이와 함께 국민의 심성이 좀먹고 정부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다.
이런 사태는 정부당국자의 걱정대로 의식화된 반정부세력의 조직적인 책동 때문일 수도 있다. 버선 속처럼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참으로 땅을 칠 노릇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만 치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지금 같아선 이 사건이 찾아들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국회는 이럭저럭 넘어 갔지만 장외에서, 또 다음학기의 중요이슈로 꼬리를 물 전망이다.
이 시점에서 이런 사태를 피할 묘방이란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든 이 불건강한 수군거림과 화제로부터는 벗어나야 하고, 그러자면 정치적 공격의 과녁이 되는 사람을 뒤로 물리는 것도 한 방법일수 있다.
그런데 엎 친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이 어려운 시점에서 터진 게 독립기념관 본관 화재사건이다. 화재사건과 함께 불이 안 났으면 오히려 이상했을 정도의 갖가지 어처구니없는 문제점도 같이 노출됐다.
독립기념관은 일본교과서파동으로 분기된 국민의 극일 에너지를 상징하는 전국민의 성금으로 짓고 있는 민족의 성전이다. 그만큼 화재로 인한 국민의 놀라움과 분노 또한 크다.
아직 의문점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지만 화재원인은 전압의 과부하로 천장 간접조명 등에서 일어난 불꽃이 먼지와 가연성 FRP에 인화되고 그것이 천장에 쳐 놓은 나일론 망을 통해 급격히 번졌다는 것이다.
그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일반 고층건물에도 안 쓰는 가연성 자재를 역사적 기념물에 쓴 것이라든가,
2년간의 공기에 두드려 맞추기 위한 무리와 잦은 설계변경, 하청 부실을 막지 못한 중앙통제 미비, 극 일의 본당에 일제 기자재와 일본기사를 쓰는 의식마비 등 지적해야 할 문제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화재로 부각된 여러 문제점 중에는 확실히 우리나라 관민의 심성이나 수준을 반영하는 것들도 적지 않다. 조급성·저돌맹진·자기현시욕·부실한 끝마무리 등 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독립기념관뿐 아니라 86·88에 맞추는 공사가 얼마나 많은가. 맞출 수 있는 것도 있고 맞추기 힘든 것도 있고, 맞출 수 없는 것도 있는데 필요하다고 하면 형편이나 주변여건을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밀고 가는 것이 소신이요, 능력으로 인정받는 세대다. 그러자니 자원배분이 왜곡되고 마무리가 부실할 것은 부문가지다.
전국각지의 좋은 나무를 급하게 옮겨 심어 고사 목을 만든 올림픽공원이나, 비가 새는 독립기념관 전시장이나, 벌써부터 상당구간이 내려앉고 패어 버린 올림픽고속도로가 가슴아프게도 우리의 현 수준이다.
그렇다고 독립기념관의 화재를 가져온 부실공사를『우리수준이 그런 것 아니냐』고 간단히 체념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개선도 없고, 발전도 없다. 철저한 원인분석과 뼈아픈 회 오·반성을 통해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내각의 책임자가 이번 사건은 그렇기 때문에 일개부처가 아니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란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참으로 존경할 만한 당당한 자세다.
다만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는 그러한 훌륭한 생각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듯한 모양이 되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처리하기에 따라서는 독립기념관 사건은 국민은 물론, 정부·여당에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제는 머리를 짓누르는 성 고문의 물의나 화재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싶다. 분위기를 일신해 사기저상의 상태에서 떨쳐 일어나는 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당·정의 대폭개편을 건의한 집권당도 분위기일신을 기대하고 있고, 국민들도 그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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