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진해운 사태 더 꼬이게 한 배임죄, 이참에 손볼 때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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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한항공 이사회가 다섯 차례 회의 끝에 한진해운에 대한 600억원 자금 지원을 승인했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바다에 떠돌고 있는 한진해운 선박들의 하역 비용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이다. 한진그룹은 보름 전 자금 지원을 발표했지만 이사회 승인이 나지 않아 난항을 겪었다. 확실한 담보 없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하면 배임죄에 걸려 이사들이 형사처벌을 받게 될까 두려워해서다.

사상 초유의 물류대란을 빚고 있는 한진해운 사태는 수출 차질뿐 아니라 국가 신뢰에도 흠집을 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는 만큼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대한항공 이사회는 배임을 피하기 위한 방법을 찾느라 금쪽같은 시간을 보냈다. 세계 10위 무역대국이 고작(?) 600억원에 발목 잡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 것이다. 이번 기회에 다시 배임죄 조항을 제대로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배임죄는 그동안 많은 논란을 빚어 왔다. 형법 제355조 제2항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를 배임행위로 규정하고 있는데, 형사범죄 중 가장 모호한 조항으로 꼽혀 왔다. 기업인의 경우 업무 수행 행위가 어느 정도면 임무 위배이며 배임죄로 처벌될 것인지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게 특히 문제다. 현행 배임죄는 ‘재산상의 이득을 취하거나 제3자에게 이를 취득하게 해 회사에 손해를 가한 때’ 처벌하도록 돼 있다.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심지어 법원 판결이 1·2·3심이 모두 다른 경우까지 있었다.

경영 잘못에 대해 민사상 책임 외에 형사상 책임을 묻는 배임죄를 별도로 규정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과 독일·일본 정도다. 그나마 독일은 ‘경영상 판단을 존중’한다는 면책규정이 있고, 일본은 고의성이 분명한 경우에만 처벌하도록 돼 있다. 이제 우리도 배임죄 규정을 근본적으로 손볼 때가 됐다. 적용 범위와 기준을 분명히 하고 명백한 고의성이 있을 때만 처벌하도록 잣대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 배임죄가 더 이상 기업과 기업인의 정당하고 적극적인 경영활동마저 위축시키는 족쇄가 돼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