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은 어디서나 빛이 나듯…|유민 홍진기형 영전에…민복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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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유민.
인생이 덧없고 무상하다 하지만 어찌 이처럼 허무하게 세상을 버리시옵니까.
아직도 하실 일이 태산 같고, 또 한창 뜻을 걸치실 연륜이신 유민의 부음에 오직 하늘을 원망할 따름입니다.
망연자실, 무너져 터지는 가슴 어찌할 바 모르겠고 복받치는 슬픔을 어찌 필설로 표현하리오.
유민.
나와는 동복이 아닐 뿐이지 친형제 이상으로 지내온 50년이 아닙니까.
경성제대 법과 동문으로 출발한 이후 유민이 비록 3년 후배였지만 청·장년시절의 공직생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늘과 실처럼 살아온 우리였읍니다.
밤새워 고담준론을 나누기도 했고 사사로운 가정생활까지 일일이 흉금을 털어놓고 상의하던 유민이 어찌 한마디 말도 없이 홀로 내 곁을 떠난단 말입니까.
유민.
학창시절의 유민은 무척 성실하고 재주가 빼어난 학구파로 도서실을 떠나지 않았고 문흥주 형과 단짝이었지요.
특히 상법에 조예가 깊던 유민을 상법교수가 「당대 상법의 제1인자」라고 소개하던 기억도습니다.
해방 직후 동숭동 아래윗집에 살면서 늘 생계걱정·아이들 걱정을 나누며 매일 아침 같은 차에 타고 출근하던 일은 지내고 보니 즐거운 추억이 아니었읍니까.
고문합격 후 법관으로 출발해 법무부장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공직생활이 어찌나 같았던지 지금 생각해보니 이 또한 각별한 인연이었나 봅니다.
특히 유민은 해방 직후 법무국장으로 재직하며 한일회담 대표로 외교실력을 발휘, 변영태 외무부장관이 탄복을 금치 못해 외무부차관으로 발탁하려고 몇 번이나 이승만대통령께 진언했던 일은 당시 관가의 화제였지요.
유민.
구슬은 어느 곳에서나 빛이 나듯이 유민은 후반기 언론계에서도 찬연히 빛을 발하였읍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옛말처럼 유민의 혜안을 바탕으로 중앙일보가 최단시일에 정상의 위치에 우뚝 솟지 않았읍니까.
또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유민이 최근에는 컴퓨터·반도체 등의 첨단과학 전문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내심 놀라움과 부러움과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이처럼 유민이 튼튼히 다진 기초를 바탕으로 생전에 뜻하시던 여러 일들이 앞으로 더욱 번창하리라 확신합니다.
유민.
일요일이면 언제나 나에게 던지던 정겨운 인사말이 아직 귓가에 맴돕니다.
『인재, 과외공부를 너무 많이 하십니다.』
골프 시작 전 내가 연습 공을 많이 친다고 하시던 농이었지요.
환경이나 성격·취미가 같은데다 골프실력마저 똑같아 우리는 매주일 서로 전의를 불태우며 즐거워하지 않았읍니까.
20년 맞수이던 유민이 먼저 가시니 나는 이제 무슨 재미로 여생을 지내야 합니까.
유민.
형제 같던 정진숙·안희경 형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들립니까.
비록 유민의 몸이 이승을 먼저 떠난다 해도 결코 우리의 마음은 유민을 멀리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영생하시어 굽어살피소서. 삼가 엎드려 명복을 비옵니다. <전 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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