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힘차고 자유분방한 선이 특징|은지화는 고려청자 기법 살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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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중섭은 1956년 그가 세상을 떠난후 두차례의 유작전을 비롯해서 작가론·평론 또는 영화화등으로써 우리들에게 많이 소개된바 있었다. 더우기 그의 짧은 생애에 있었던 슬픈 이야기가 지나치게 소개됨으로써 그의 드물게 볼수 있는 회화의 독창성이 오히려 가려졌지 않았나 하는 기우마저 느끼게 된다.
흔히 한국미술의 특질을 선의 미술로 평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것과 비교할때 수긍이 갈만하다. 사실 우리의 선조들이 남긴 수많은 회화·조각·건축·공예등의 미술품중에서 이 점을 쉽게 발견할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가 남긴 3백점에 가까운 작품을 대할때 제한된 주제성보다도 강렬하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그의 생동감 넘치는 힘과 유동성 있게 흐르는 자유분방한 선인 것이다. 그의 절제된 색의 구사에 앞서 압도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선을 내나름대로 다음 몇가지로 읽어보고자 한다.
①종이와 합판등에 유화로 그린 일련의 소 작품이나 가족등의 인물화에서는 먼저 선묘를 하지 않고 대상을 대체로 면으로 표현한 다음 마르기전에 강조하고싶은 부위를 진한 색으로 힘찬 선을 그림으로써 역동감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같은 인물화에 있어서도『물고기와 아이들』(도판15, 종이에 유채, 22.5×17cm)같은 것을 보면 채색전후에 연필로 윤곽을 선묘함으로써 다음의 음각기법의 시작을 엿볼 수 있다.
②드로잉에 속하는 그림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소와 새와 게』(도판46, 종이에 연필과 유채, 35·5×49·8)나『봄의 어린이』(도판56, 종이에 연필과 유채, 32·6×49.6cm같은 표현기법은 이제까지 한국화가의 작품들 중에서는 처음 시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회색조의 섬세한 톤의 변화를 주는 밑바탕 유화물감을 바른 다음 마르지않은 상태에서 연필로 음각의 효과를 내며 자신있는 힘찬 선묘로써 끝을 맺어버린 작품들이다. 나는 이러한 묘법을 보며 조선조 초기의 분청사기에 있어서 백점토유약의 균열문양에다 그린 그 많은 어문같은 것을 연상하게 된다.
③엽서화라는 장르의 소품들의 표현기법은 종래의 서양화기법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동양의 전통회화에서 사용된 기법의 하나인 구륵법으로서 대상의 윤곽선묘를 한뒤에 그 내면에 비교적 선명한 채색으로 메워져있는 기법을 볼 수 있다.
수채화 물감은 그래도 그당시 입수가 되었는지 유화물감보다 다양함을 느낄수 있다. 유화물감의 입수가 어려웠던 때였기에 불가피한 결과인지는 모르나 남은 작품을 볼때 회색중심의 억제된 색채를 사용했음이 눈에 띈다.
나는 1955년말에 성북동에 있던 수화(김환기)댁에서 대학선배인 유석진박사의 소개로 처음 그를 만났을때의 그의 색채에 대한 고백을 기억하고 있다. 마침 수화선생이 그 당시 파리에서 출판된 모테(Yvonne Mottet, B.Lorjou의 부인)의 화집을 보여 주었다.
가로수를 그린 작품인데 주홍색같은 강렬한 색채가 칠해진 것을 그는 한참 쳐다보더니『어떻게 이같은 강한색을 쓸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감탄하고 있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나는 그순간 그가 색을 굉장히 절제하고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④은지화에 있어서는 완전히 고려청자의 상감기법을 이용한 표현기법으로 독창적인 선묘화의 경지에 도달했다. 많은 인물들의 표정은 때로는 슬프고, 또는 웃음도 머금고, 어떤 것은 불상을 연상케하는 표정마저 읽을수 있다.
이대원<서양화가·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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