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클린턴 최대자랑은 '일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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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992년 미국 대통령에 출마한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이 걸프전을 승리로 이끈 현직 대통령(아버지 부시)을 이길 가망은 별로 없어 보였다.

클린턴의 선거참모들은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문제를 부각시키는 것뿐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당시 미국 경제는 걸프전을 고비로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다. 성장은 둔화됐고, 실업이 늘었다. 유권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산층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유지될 수 있을지를 걱정했고, 막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들은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클린턴은 '중요한 건 경제야, 이 바보야(It's economy, stupid)'란 캐치프레이즈로 단번에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제는 일자리를 어떻게 만드느냐였다.

클린턴은 당시 하버드대 케네디 정부정책대학원의 교수였던 로버트 라이시를 불렀다. 클린턴은 라이시에게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했다. 라이시는 사람에 대한 투자를 꼽았다. 경쟁력있는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기업들이 투자와 생산을 늘릴 수 있는 기본 조건이라는 얘기였다.

클린턴의 선거참모들은 라이시의 제안을 '사람 우선(Put People First)'이라는 선거캠페인 구호로 포장했다.

라이시의 '일자리 만들기'구상은 91년 간행돼 이제는 고전이 된 '국가의 일(the Work of Nations)'이란 명저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국경을 넘어선 경쟁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국가의 테두리 안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그 영토 내에 뿌리내리고 사는 사람들뿐이라고 했다. 라이시는 여기서 국가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국민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고, 이들의 소득을 높이는 것이라고 갈파했다.

라이시는 일자리를 만들 수만 있다면 기업을 누가 소유했는지 국적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일본에 진출해 일본인을 고용하는 미국인 소유의 기업보다 미국에 투자해 미국인을 고용하는 일본인 소유의 기업이 더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고도 했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해진다. 어떤 기업이든 소유주의 국적을 가릴 것 없이 자국 땅 안에 공장을 짓고 물건을 만들 수 있도록 정책을 펴면 된다는 얘기다.

77년 오하이오주는 1천5백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조건으로 일본의 혼다 자동차에 각종 보조금과 세금 감면 등을 통해 2천2백만달러를 지원했다.

85년 일리노이주는 미쓰비시 자동차를 유치하는 데 10년간 2억7천5백만달러의 대가를 지불했다. 앨라배마주가 현대자동차 공장을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특혜를 마다하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라이시는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에 앞서 인적 자본(human capital)에 대한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수한 인력이야말로 기업이 투자를 결정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핵심적 인프라라는 것이다.

클린턴은 대통령에 당선됐고 라이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경제팀을 이끌고 새 정부의 정책구상을 짰다. 클린턴 1기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맡은 라이시는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대규모 교육투자와 함께 일자리와 연계된 세제지원이 잇따랐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국 경제는 사상 최장의 호황을 구가했다. 92년 7.5%에 달했던 실업률은 2000년 4%로 사상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클린턴은 퇴임한 후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재임기간 중 2천2백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 것을 꼽았다.

김종수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