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병 양산한 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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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나라에는 한 시절 지방을 무대로 한「돌팔이 의사」가 성행했다. 제대로 면허를 가진 의사가 부족한 틈을 타 무면허 의료업자의 사기와 횡포가 심했던 것이다. 요즈음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요즘은 면허와 명성(?)이 있는 의사가 부정하고 부당한 의료행위를 하는 경우가 잦다. 돌팔이 의사는 없는 기술을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 때문에 조금만 식견이 있거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면 그 사기성을 쉽게 가려낼 수 있다. 그러나 버젓이 자격을 갖춘 자가 사기를 치면 누구도 감히 그 전문성의 권위에 도전할 수가 없다. 꼼짝없이 당하게 돼 있다. 완벽한 사기가 가능한 것이다.
70세를 코앞에 둔 한 노 의사가 인체의 질병을 진단하는 건강관리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수천 명 고객들에게 없는 중병을 있다고 속여 자기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고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한다.
그 죄 값은 앞으로 사직당국이 가리겠지만 환자 아닌 환자 쪽에서 보면 지난 동안 금전적인 손해는 말할 것도 없고 터무니없는 중병위협으로 얼마나 겁을 먹고 걱정을 했겠는가. 이 의사의 자격과 권위는 완벽하다.
일제 때 조선총독부 의사고시에 합격해서 어엿한 자격증이 있으며 외국유학까지 했던 사람이다. 게다가 이 사람이 10여 년간 경영해 온 건강관리연구소는 갖가지 현대적 의료검진설비를 갖추고 20여명의 의료진이 일을 하고 있어 웬만한 종합병원 못지 않은 외형적 위세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훌륭한 조건이 엉뚱한 환자를 양산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목적에만 사용됐다면 의사의 도리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교인을 정신적인 구원자라고 한다면 의사는 내 체와 생명의 구원자다. 환자가 의사를 찾아갈 때는 누구든지 약한 마음이 되고 구원의 밧줄을 잡겠다는 심정이 된다. 의료란 전문분야이기 때문에 의사의 진단은 누구도 감히 의심하거나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권위와 신뢰가 강요돼 있는 것이다. 그 권위를 이용하여 고의적으로 사기를 친다면 이는 곧 배신이오 배 덕이다.
의료인의 윤리가 거론되는 일은 종종 있어 왔다. 돈 없는 환자의 치료를 기피한다 든가, 높은 오진 율, 과잉진료, 차별진료, 부당한 의료수가 문제 등 불미한 사례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 한 소비자 단체가 최선의 진료를 정당하게 받기 위해「환자의 권리선언」제정을 추진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비윤리적 의료행위에 대한 경종인 동시에 의료인과 환자사이의 신뢰를 확고히 정착시키려는 노력이다. 환자가 의사를 불신하면 치료효과 자체에도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번 의료 사기사건으로 전체의료인과 의료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흔들릴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의료인들이 공정하고 성실하게 진료를 천직으로 알고 이에 헌신하고 있다고 믿는다.
다만 현대의 의료종사자들은 권위와 시혜의식에 안주하는 타성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의사와 환자의 사이는 의료상품의 공급자와 수요자라는 상호 평등한 관계의 정립이 필요하다. 양질의 의료서비스가 제공돼야 하고 그 서비스의 필요성과 내용도 환자에게 소상히 알려야 한다. 분명하고 공정한 의료거래질서가 자리잡히면 의료인에 대한신뢰도 자연히 확고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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