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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만 만들어진 책꽂이, 밀라노서 호평받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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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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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혁 대표가 자신이 디자인 한 화장대 앞에 서 있다. 이 제품들은 이달 중순 프랑스 파리의 유명 백화점 르 봉 마르쉐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국내 가구디자인 업체의 르 봉 마르쉐 입점은 처음이다. [사진 김춘식 기자]

흔히 보아왔던 북스택(BOOK STACK·책꽂이)이 아니었다. 네모 반듯한 모양에 뒷면에는 책이 떨어지지 않게 막아놓은 그런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기다란 철제 막대들로만 이뤄진 말 그대로 ‘선(線)’으로만 꾸며진 북스택이 우선 눈에 띄었다. 또 특이하게도 삼각형 모양을 한 쓰레기통, 안쪽이 살짝 휘어진 명함꽂이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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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된 책꽂이.

지난 1일 찾은 서울 서초구의 가구디자인벤처 ‘움직임(UMZIKIM)’ 스튜디오는 독특한 디자인의 가구들로 가득했다. 움직임의 대표인 공학디자이너 양재혁(28)씨에게 제품 설명을 부탁했다. 눈길을 끌었던 북스택은 2013년 밀라노 가구박람회에 선보여 호평을 받은 그 디자인이었다. 양 대표는 “왜 책꽂이 밑바닥이 면이어야 하나요? 책을 빽빽하게 꽂아도 쓰러지지 않는 책꽂이를 만들기 위해 책의 무게 중심과 중력을 계산해 디자인하다 보니, 책꽂이 바닥이 면이 아니라 선이 되더군요”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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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 모양 쓰레기통.

또 삼각형 모양의 쓰레기통은 벽 코너에 놓고 쓸 수 있어 원형이나 사각형보다 공간과 재료비를 절감할 수 있고, 명함꽂이는 내부가 살짝 휘어져 있으면 한 장씩 간편하게 명함을 꺼낼 수 있다고 했다.

공학디자이너 양재혁 ‘움직임’ 대표
서울대 공대 융합교육 성과 1호
기계항공공학부 동기들과 창업

양 대표는 애초 공대인 기계항공공학부에 입학했지만 화가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늘 디자인과 예술 분야에 눈길이 갔다고 했다. 그러던 중 2학년 때 ‘통합 창의 디자인 연계과정’을 모집하는 현수막을 발견하고는 그길로 등록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그는 공학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융합 분야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됐다.

“융합은 하나의 방법론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공학이든 디자인이든 무언가를 ‘만든다’는 행위는 같아요. 저는 제품을 잘 만들기 위해 공학적 요소와 디자인적 요소를 합치는 디자인을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침 4학년이던 2011년 학교의 지원을 받아 한 달간 삼성디자인밀라노센터에서 연수할 기회도 얻었다. “연수받으면서 스마트폰 같은 전자제품은 어렵겠지만 가구는 내 손으로 디자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해 11월 마음 맞는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08학번 동기 5명을 모아 ‘움직임’을 만들었다. 소비자들이 제품을 사용하는 순간의 움직임마다 감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서울대 교내에 9.9㎡(약 3평)의 조그마한 공간이 시작점이었다. 서울대 공대의 융합교육 성과 ‘1호’ 벤처기업 회사인 셈이었다. 하지만 디자인 철학을 세우고 비전을 세우는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다. 융합과정을 거쳤지만 디자인 지식이 일천했고 신용이 낮아 담보대출은 엄두도 못 냈다.

그러나 ‘움직임’ 멤버들은 해외 가구전시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제품과 디자인을 홍보하며 이름을 알려 갔다. 그 덕분에 ‘움직임’은 지난해 5월 밀라노에서 열린 엑스포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가구디자인 업체로 초청받았다. 또 한국 업체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디자인 매장 ‘ABC홈’에 진출했다. 평범을 거부하면서도 편리성을 추구하는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양 대표의 꿈은 당차다. “제조업은 나라가 곧 가치예요. made in italy와 made in china의 차이를 생각해보세요. 저희는 공학 디자인이라는 분야로 한국 제조업에 새로운 흐름(movement)를 만들고 싶어요.”

-공학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설명해 달라.
"실용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제품을 만들든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이외에 뭔가 특별한 것이 더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실용성이라 보고, 제품 기능을 향상시키는데 집중했다. 책꽂이에 ‘책이 쓰러지지 않는 기능’을 추가하면서 ‘북스택’이라는 비스듬한 사선 형태의 새로운 제품이 나왔다. 공학 디자인은 이렇게 디자인을 통해 물건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바꾼다."

-공학 디자이너는 일반 디자이너와 작업하는 스타일이 다른가.
"생각의 출발점이 다르다. 디자이너들이 제품의 모양이나 소재의 미적인 면을 먼저 고민한다면, 우리는 인체공학적으로 더 편하게 제품을 이용하는 방식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 후 계산을 통해 현실화 할 수 있는 제품인지 검토하고, 심미적 측면을 고려한다."

-직선이 강조돼 제품들이 딱딱하다는 느낌을 준다.
"밀라노 박람회에 출품했을 때, 관람객들이 우리가 만든 책상 ‘메이 데스크(MAY Desk)’를 보기 위해 발길을 돌려 부스로 다시 찾아오는 것을 봤다. 이유를 물어보니 교차하는 직선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고 하더라. 엔지니어의 느낌이 묻어나온 디자인인데, 사업 초반엔 우리의 특징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런 면을 강조했다. 요즘엔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꽃병이나 화장대 같은 제품도 많이 생산한다."

-공대출신이기 때문에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무시를 당한 적은 없는가?
"처음에는 그런 면이 있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 같았다. 그래서 밀라노와 같은 세계무대로 진출해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참고로 9월 중순에 오픈하는 프랑스 파리 르 봉 마르쉐 매장에는 르 코르뷔지에 작품 옆에 우리 제품이 있다."

-유럽에서 먼저 성공했다. 어떤 점이 차별화됐던 것 같은가?
"공학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을 하다보니 남들과는 ‘정말 달랐고’, 그것이 ‘좋게 받아들여진 것’이 성공요인이 된 것 같다. 이탈리아의 양대 일간지 중 하나인 '라 레푸블리카'가 북스택을 두고 ‘서울에서 온 스물 다섯 젊은이가 가구용품의 오랜 문제를 해결했다’고 평한 것을 봤다. 우리는 책꽂이에서 책을 ‘꽂는 행위’가 불편함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을 비스듬하게 쌓아두기 위해 무게중심과 기울기를 계산했다. 공대출신인 우리로서는 당연한 일인데, 소비자들에겐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국내에서는 움직임의 제품을 접하기 힘든 것 같다.
"데스크랩(DeskLab)이란 브랜드 런칭을 준비 중이다. 이 브랜드에 움직임의 미래가 달려있다. 나는 미래세대를 위해 디자인 하는 사람이다. 로봇과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아이들 세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다. 데스크랩은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디자인 된 제품을 팔 계획이다."

-어떤 제품을 만들지 구체적인 사례를 말해달라.
"노트를 예로 들겠다. 브레인 스토밍을 하라고 하면 가운데부터 그리지 않나. 이것이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하지만 기존 노트들은 왼쪽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로 쓰게 만든다. 이런 틀이 상상력을 제한한다고 본다. 특정한 방식으로만 생각을 구조화시키기 때문이다. 데스크랩(DeskLab) 노트는 이용자가 스스로 칸을 그리며 쓰게 하여 2차원 평면 활용법을 다양한 방식으로 고안하도록 할 것이다. 요즘 고민하고 있는 제품은 저절로 집중력을 향상시켜주는 책상이다. 창의력은 몰입하는 환경 속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창업 초기에 사업 비전을 수립하기 위해 동료들과 책을 많이 읽었다고 들었는데.
"훈민정음의 첫 문장을 좋아한다. '나랏말이 중국하고 달라서 사람이 쓰기 어려우니 글자를 만들었다'는 말을 곱씹어 보면 심한 논리적 비약이 있다. 글자를 쓰기 힘들면 가르쳐줘야 하는 것인데,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인드를 가지니 한글이라는 어마어마한 작품이 나왔다. 이렇게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승부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루라도 빨리 세계진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만들고 싶은 제품은 우리나라 시장에는 안 맞지만 분명 다른 곳에서는 시장성이 있을 수 있다. 타겟 마켓을 찾으면 성공한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중국이다. 요즘 해외에 갈 때마다 중국 사람들이 정말 글로벌하고 빠르게 움직여서, 지금 빨리 나가지 않으면 시장이 중국에 잠식당해 해외 진출 자체가 힘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유빈 기자 kim.yoovin@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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