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책임제|이정복<서울대 교수·정치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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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우리는 정부수립 이후 10개월 간의 의원내각제와 37년 간의 대통령중심제 정부의 경험을 갖고 있다.
의원내각제는 그 공과를 평가하기에는 존속기간이 너무 짧았지만 집권당 내부의 끊임없는 권력투쟁→내각의 약화→사회적 혼란→군부 쿠데타의 발발이라는 결과를 초래했고, 대통령중심제는 최고권력의 독재화와 헌정의 유린에 따른 정통성의 위기가 반복되는 결과를 자아냈다.
의원내각제하의 한국정치는 민주적이었으나 권력의 위기 때문에 혼란했고, 대통령중심제 하에서는 권력은 확립하고 있었으나 정통성의 위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나 대통령중심제라는 정부형태 그 자체가 혼란이나 독재화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정부조직의 원리면에서만 생각한다면 대통령중심제보다 의원내각제가 오히려 더 강력한 정부형태다.
대통령중심제의 엄격한 삼권분립에 비해 의원내각제는 의회와 내각의 권한이 내각에 집중되는 권력 융합체이기 때문에 내각은 집권당 내부의 결정만 있으면 어떤 정책이든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의원내각제가 실패한 근본원인은 제도 자체에 있지 않고 민주당정권시절 집권당 내부의 권력구조가 원심화 되어 있고 군이 다른 사회조직에 비해 비대 성장하여 정치영역에 개입한데 있었다.
다시 말해 의원내각제를 채택할 경우 잘되면 권력 융합적인 강력한 내각과 안정된 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고 못되면 불안정하고 약한 내각에서 나오는 권력의 위기와 사회적 혼란을 맞게 될 것이다.
반면 대통령제를 채택할 경우 잘되면 삼권분립의 견제를 받는 강력한 대통령제와 안정된 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고, 못되면 삼권분립을 무시하는 독재적인 대통령과 대통령의 독재성으로 인한 정통성의 위기를 가질 것이다.
이 같은 원리에서 우리의 정치현실은 어느 정부형태를 택하든 잘못될 위험성도 내포하기 때문에 못될 경우에 우리에게 희생을 적게 주는 정부형태를 채택하는 방법도 고려해 봄직하다.
현재 정부-여당은 직선대통령제에 대한 반대 입장을 확고히 세우고「중선거구·최다수제」선거에 의한 의원내각제나 이와 유사한 정부형태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야당은 직선 대통령중심제를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다.
정부촵여당이 대통령직선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이 제도 하에서는 계속 집권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데 있다.
현행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대통령제도 정부·여당의 집권유지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위태롭게 하고 한국의 브라질화나 필리핀화를 유발시킬 위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간선제는 신민당을 비롯한 야당들과 재야세력이 반대한다는 점에서 정부·여당에 대해 연합전선을 펴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정부-여당이 당면한 이와 같은 위기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줄 정부형태가 의원내각제다.
공평한「소선거구·최다수제」가 아닌「중선거구·최다수제」에 의한 의원내각제는 정부-여당의 계속 집권에 도움을 줄 것이며 의원내각제는 현행 간선대통령제보다는 개선된 체제이므로 반체제의 명분도 약화시킨다.
특히 의원내각제는 그것이 잘만 추진된다면 야권과 재야사회세력을 분화시키고 집권세력을 결속시키게 된다. 의원내각제는 여당의원이든 야당의원이든 의원들의 이해관계와 합치되는 정부형태이기 때문에 야당의 공식입장과는 달리 이를 지지하는 야당의원들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야당이 의원내각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이 정부-여당에 유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야당은 1구 1인을 뽑는 공평한「소선거구·최다수제」선거에 의한 의원내각제 하에서도 반드시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선 자금과 행정권력의 지원면에서 크게 불리하다.
야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경우도 정부-여당은 일부 야당의원들을 야권에서 이탈시킬 수 있는 경제적·권력적 자원을 갖고 있고 야당내의 계파간 이해관계의 복잡한 상충을 고려 할 때 이러한 가능성을 결코 배제 할 수 없다.
때문에 야당은 당연히 대통령직선제를 지지하고 집권가능성이 높은 그들의 대통령후보를 중심으로 결속할 것이다.
그러나 국회내의 세력판도를 고려할 때 정부·여당의 개헌안은 현재로서는 국회통과가 될 수 도 있지만 야당의 직선제는 통과가 불가능하다.
야당은 장외투쟁을 통해 집권세력이 후퇴하도록 하는 이외에는 그들의 개헌안을 관철시킬 방법이 없다. 그러나 한국의 집권세력은 아르헨티나·브라질·필리핀 등의 구 집권세력과는 달라 장외투쟁으로 후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당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부-여당과 타협하는 방법과 재야세력과 같이 직선제외에는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장외투쟁을 전개하는 방법 등 두 가지가 있다.
만약 야당이 끝까지 장외투쟁의 방법을 택한다면 한국정치는 저항운동과 탄압이라는 제4공화국 이래의 악순환을 평화적으로 타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집권세력도 물론 정통성 회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데 있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힘들 것이며 의원내각제를 수락할 수 없다면 현행제도의 지속 외에는 별 방도가 없다고 나올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중심제를 둘러싼 이 같은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정부·여당이 야당도 타협에 나설 수 있는 명분과 실리를 먼저 제공해주는 길 밖에는 없다.
타협의 방법에는 정치가「가능성의 예술」인 만큼 직선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공평한 1구 1인의「소선거구·최다수제」선거에 의한 의원내각제 개헌도 그 한가지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선거구·최다수제」에 의한 의원내각제는 의원내각제의 장점을 가질 뿐 아니라 국민대다수의 의사가 명백하게 반영되는 정부형태이기 때문에 정통성의 회복효과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야간의 어떤 타협에도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보장과 교육·노동계 등 사회의 민주화 및 사법권의 독립과 같은 광범한 분야에 걸친 민주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민주화가 없는 여야의 타협은 민 의를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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