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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깜깜이 재판’이 된 최유정 변호사 공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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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선미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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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사회2부 기자

정운호 전 네이처리퍼블릭 대표 등으로부터 100억원대 부당 수임료를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유정 변호사의 첫 공판이 2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혐의를 입증할 서류 증거물에 대한 조사가 예정돼 있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검사가 “증거물을 일일이 제시하고 열람하는 방법도 고려했지만 오늘은 서류 증거에 대해 작성한 의견서를 바탕으로 조사를 진행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검찰 측은 평소 주요 사건들의 1차 공판 때와 달리 재판정 내에 설치된 스크린에 증거 서류를 띄우지도 않았다. 검사는 증거의 내용을 읽는 대신 그 내용의 취지만 간략히 설명했다. 기자를 비롯한 방청객들은 검찰이 요약한 내용 외에 자세한 증거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최근에는 볼 수 없었던 옛날식 재판 진행을 지켜본 기자들은 나흘 전 열린 홍만표 변호사에 대한 첫 재판을 떠올렸다. 최 변호사의 재판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서증 조사 과정에서 검찰은 미공개 증거들까지 스크린에 띄웠다. 특히 정 전 대표를 접견한 한 변호사의 진술조서 중 “정 전 대표가 ‘홍만표가 청와대 민정수석과 차장검사를 다 잡아놨다고 했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시선을 끌었다. 이에 따라 재판 직후 우병우 민정수석의 정운호 구명 관여 의혹을 제기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자 검찰은 바로 “홍 변호사와 정 전 대표 모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고, 진술자가 정 전 대표와 사이가 좋지 않아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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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두 재판을 모두 지켜본 한 법조인은 “최 변호사 재판에서도 새로운 정보가 세상에 알려져 검찰이 다시 난처한 상황에 놓일까봐 태도를 바꾼 것 아니겠느냐”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다른 법조인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형사소송법은 법정에서 서증조사를 할 때 내용을 낭독하는 게 원칙임을 명시하고 있다. 법정에서 직접 조사해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고 공정한 재판을 실현해야 한다는 ‘공판중심주의’ 구현을 위한 것이다. 재판장이 필요성을 인정하면 내용의 취지만 알리는 방법으로 진행할 수도 있지만 최 변호사 재판에선 별다른 이유도 제시되지 않았다.

형사재판에선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까지도 모두 공개되는 게 원칙이다. 대법원은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는 수사 및 공판 과정에서 발견한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도 제출해야 한다”고 밝혀왔다. 검찰이 자신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증거가 법정에서 공개될까봐 재판 방식을 바꿨다면 이는 시대를 거스르는 ‘역주행’으로 볼 수 있다. 검찰과 법원이 ‘깜깜이 재판’ 때문에 얻은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 재판 과정과 증거 공개 범위를 넓혀 온 자신들의 역사를 잊지 않기 바란다.

김선미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