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신상옥·최은희 부부 회견장 이모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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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최 부부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본인들의 말치고는 지극히 여유 있는 모습으로 기자 회견장에 나타났다. 워싱턴 시경에서 파견된 두명의 정복 경관 이외에 다른 경호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초컬리트색 양복과 스카프를 두른 신씨와 검은색 투피스에 옅은 색 안경을 쓴 최씨가 열발짝쯤 떨어져서 걸어 들어왔다. 이들은 입구에서부터 카메라멘들에 둘러싸이자 익숙하게 요청대로 포즈를 취했다.
신씨는 질문을 받기에 앞서 자신이 84년 베오그라드 기자 회견에서 자진 월북했다고 한 것은 강요에 의한 거짓말이었다고 사과하고 특히 그 동안 한국 기자들의 접근을 기피해서 애를 먹인데 대해 사과했다. 그는 또 한국 기자들과 만나기에 앞서 뉴욕 타임즈 및 워싱턴포스트 기자와 단독 회견을 한 것은 자기들의 보도가 객관성을 갖게 하기 위해 제3자를 앞세우려 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최씨는 자신이 납치 당하던 상황을 이야기할 때 한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였으나 두 사람 모두 침착한 태도로 답변했다.
신씨는 회견 도중 만약 북이 자신들의 기자 회견 내용이나 돈 문제로 인신 공격을 할 경우 자기들은 2차, 3차의 폭로로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는 반격을 가하겠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나 시종 김일성에 대해서는 「주석」이라고 부르고 김정일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그분」이란 경칭을 써 한국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기자가 『김정일 운운』하고 물으면 반드시 『그분은-』하고 답변했다.
이날 회견의 특이한 점은 그와 같은 불협화음의 연속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김일성·김정일 등 세계에서 가장 안 알려진 인물에 접근했던 어쩌면 유일한 외부인이기 때문에 기자들이 그들의 체험적 인물평을 여러번 요구했으나 늘 응답은 단편적이고 모호한 것이었다. 김정일이 무자비한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해 신씨는 침묵하고 최씨가 『성질이 급해서 그러는 거지요』라고 짤막하게 답변할 뿐 실례를 들지 않은 것이 좋은 예일 것 같다.
신씨가 북에 대해 위협적으로 말한 『제2, 제3의 반격』을 위해 그런 정보를 남겨 두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날 최씨는 자신이 납치되던 상황을 이야기할 때를 빼고는 대개 신씨의 이야기를 옆에서 거드는 정도로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신씨가 둘이서 탈출을 결심하던 때를 이야기하자 최씨는 『나는 이 양반한테 「이번엔 우리 인생 문제를 감독하고 주연하세요」라고 격려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신임을 얻고, 외국에 로케를 나오기 외해 외국 무대가 필요한 『돌아오지 않는 밀사』, 『칭기즈칸』 등의 작품을 계획한 것 등이 자신들을 위한 대 탈출극이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북한의 내부 상황에 대해서는 줄곧 언급을 회피했으나 『북한인들이 김 부자를 하느님 같이 보고 있지만 어떤 계기가 오면 불평이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어떤 계기」가 김일성의 죽음을 뜻하는 것 같았으나 더 이상 설명치 않았다.
신·최 부부는 다정하게 옆에 앉아 서로 보고 웃기도 하고 서로 말을 거들어 주기도 했으나 최씨가 신씨를 보고 「남편」, 「이 양반」 등 친숙한 칭호를 쓰는데 비해 신씨는 어김없이 최씨에 대해 「최 여사」라고 경칭으로 불러 대조를 보였다.
회견장에는 신민당 방미단 중 김동규·정재문·송현섭·김동욱 의원도 짬을 내 참석, 관심을 가졌는데 이들의 회견이 끝나고 1시간 후엔 내셔널프레스 클럽에서 이민우 신민당 총재의 외신 기자 회견이 있어 이날은 워싱턴 보도진의 시선이 온통 한국 관계에 쏠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한 외국 기자가 『오늘 신민당 총재의 기자 회견의 김을 빼기 위해 당신들이 회견을 하는 게 아니냐』고 질문하자 신씨는 『금시초문』이라면서 『공교롭게 겹쳐 상당히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신씨는 이번 회견이 이미 지난주에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이 총재의 회견을 방해하려 거나 5·18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고 반복 강조했다.
신씨는 작가 최인호씨가 한국 일간지에 자신에 대한 추모의 글이 실린 걸 봤다고 말했는데 옆에 앉은 최씨는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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